[드네자캐] 늦봄

자캐 2015. 7. 7. 11:33


나인(@9_shelf)님이 제작해주신 웹표지입니다. 감사합니다! ♡





늦봄

-라이올 엔딩

로디온x라이올




  너의 장례식은 늦봄이었다. 너와 꼭 어울리는 날이었다. 한철 활짝 만개했던 꽃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네 관 위에 흩어졌다. 사람들은 빈 관이 묻히는 곳을 바라보며 울었다. 어떤 이는 그저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어떤 이는 혀를 찼다. 아랫입술을 깨물어 슬픔을 참는 이와 아무런 감정도 내색하지 않는 이들까지 모두가 자신의 방식대로 너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섞여있는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네 앞의 내가 늘 그랬듯이.


  조물주가 있다면 너는 세상에 나기 전부터 그의 숨결을 받아 착하게 태어나거라, 하는 말을 듣고 세상 빛을 본 듯했다. 사랑도 많고, 친절도 많고, 웃음도, 눈물도 많았으며 오지랖도 많았고 호기심도 많았다. 작은 몸에 가진 것도 많으면서 욕심도 얼마나 많았던지 크지 않은 마을에서 너에겐 매일이 배울 것투성이라며 참 열심이었더랬다. 그렇게 끌어안은 것들을 베풀 줄도 알아서 네 주변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좋은 사람에겐 사람이 저절로 모인다는 말이 아니다. 너는 네 손으로 네가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았고 늘 노력했다. 잠시나마 옆에서 지켜본 내가 알 정도니 다른 이들은 오죽했을까. 그러니 네가 일찍 떠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고 장례식 내내 옆에 서있던 누군가가 혼잣말을 했다.


  마침 가까이 머물던 나를 굳이 찾아 나선 누군가의 덕에 검은 옷을 입고 너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었다. 죽었대. 찾은 거라곤 고작……. 너무나 가벼운 관을 너와 가까웠던 이들이 무겁게 땅 속으로 내리는 동안에도 그 때 들었던 소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현실로 느껴지지 않아서일지 몰랐다. 너와 내가 서로를 보지 못한 지는 벌써 몇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별 같지도 않은 마지막을 저무는 해처럼 수평선 위로 보내버리고 등을 돌린 지 꼭 세 달만의 일이었다.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보내는 일은 쉽다. 그들은 언제든지 돌아올 기약이 있으니까. 내가 발길을 돌렸을 때쯤의 너도 그랬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납득하고 너를 설득했다. 용기가 아닌 단지 충동으로 너를 받아들인 나를 비겁하게 눈 가린 그 헤어짐마저도 너는 좋아한다며 웃어주었다. 이기적인 나는 그 뒤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돌아섰고, 다음은 이상하게도 네가 떠나 버렸다. 기약 없는 여행이었고 나는 처음으로 남겨지는 이가 되었다.


  분명 복잡한 일들이었다. 단순히 감정과 개인의 성질이 아닌, 좀 더 첨예하고 빡빡해서 네게 상처를 줄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랬는데. 작은 소년의 죽음 앞에 그 많던 고민들이 사막의 풀 한 포기만큼도 못하게 되었다. 네가 내게 그렇게 큰 존재였던가. 여전히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 . 네가 묻혔어야만 할 자리를 등졌다. 나 역시 발걸음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무덤을 떠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이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함께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보다 얼굴을 보지 않은 시간이 더 길었다. 열여섯 해는 생을 마감하기엔 충분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서 한 사람을 만나는데 들였던 세 달이라는 시간이 길다곤 말 할 수 없었다. 평생을 함께 사는 가족들도 서로를 몰라 삐걱이기 일쑤인데 고작 세 달을 알았던 타인이라고 더 나을 수 있을까. 오랜만에 머물게 된 숙소의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반년 전 쯤 너를 처음 만나고 난 그 날 밤에 혼자 누웠던 바로 그 방이었다. 특별히 같은 방을 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주인은 똑같은 방의 열쇠를 내주었다. 알아챈 것은 침대에 눕고 나서였다. 반 년 전의 나도 똑같은 침대에 누워 똑같이 너의 생각을 했었다. 같은데도 같지 않았다. 우연이네. 실소가 나왔다.


  어울리지 않는 검은 정장이 꾸덕꾸덕하게 살갗에 눌러 붙는 느낌이 들었다. 다 알지 못하는 이들의 눈물에게서 묻어났을 짠내와 다 죽어가 늘어진 진달래 향도 함께였다. 옷을 벗으면 그만이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하루 종일 한 일이라곤 사람들 사이에 껴서 마을의 짧은 추도길을 따라갔을 뿐이었는데 먼 나라로 향하는 사막의 길을 건넜을 때보다 더욱 지쳐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한 무게감이 팔과 어깨를 타고 올라 머리와 눈을 짓눌렀다. 느리게 눈꺼풀을 닫았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번쩍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해 방문을 열었지만 눌은 내 뿐이었다. 진달래 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여행했던 어느 동방의 나라에서는, 죽은 자는 이승을 떠나기 전 자신을 추억하는 사람에게 잠시 머무른다고 했다. 너는 내가 이 곳으로 돌아와 네 생각을 하는 게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평소에 네게 내가 생각하는 양을 드러낸 적이 드물었으니 더욱 그랬을지도 몰랐다. 속을 알 수 없고 정도 붙이지 않아 어느 곳이든 금방 떠나도 이상할 것 없는 이방인에게 마지막까지 너는 지는 꽃내음을 안겨주었다. 언제든 소매 자락을 잡을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너와 사랑을 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 라고 대답할 거다. 사랑을 논하기엔 나조차도 너무 어린 나이었다. 하물며 남들이 으레 성인이라고 인정해주는 스무 해도 넘기지 못한 네게는 너무 벅찬 일이 아니었을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인연과 정의 차원이 아닌, 한 사람과 또 다른 사람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좀 더 깊은 차원의 사랑이라면 더더욱.


  분명 좋아하는 점은 있었다. 멀리서도 금방 알아보고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모습이라든지, 곤란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피곤한 성격이라든지, 어떤 웃음이냐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입매의 모양이라든지, 의외로 부끄러움도 많아 곧잘 입술을 오물이며 눈을 굴리는 모습이라든지. 방문을 닫고 돌아와 침대에 도로 눕는데도 좋아했던 점이 끊이지 않았다. 늘 생각 했던 것들인데 왜 이제야 눈치 채버린 걸까. 안개 낀 망망대해에서 건저올린 생각 하나가 멀거니 낚싯줄에 걸린 채로 흘렀다. 나는 왜 이런 모든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서 있다. 너도 언제나처럼 서있었다. 등을 돌린 채 살짝 옆모습을 보인 너는, 내가 무어라 부르기도 전에 먼저 알아채곤 환하게 웃는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도 섞인 미소가 나왔다. 너는 내가 아는 그대로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네가 달려왔다. 저렇게 달리면 넘어지지 않나. 무심코 떠오른 걱정도 세 달 전과 다르지 않았다. 한껏 달음박질 친 네가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봄을 안은 듯했다. 보름달이 세 번 차오르기 전, 가볍게 감싸주고 말았을 팔로 너를 힘껏 안았다. 솔방울 터지는 소리와 함께 품 안의 네가 사라지고 허공을 껴안았다. 진달래 꽃잎이 눈앞을 가리며 흐드러지게 휘날렸다. 손 안에 아프게 쥐어 남은 건 언젠가 선물 해주었던 머리핀이었다.


  모로 누워 잠들었던 주먹을 펴보니 붉은 자국이 남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선물 고르는 재주가 없다 싶었다. 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자리에, 피투성이로 홀로 남아있었을 그 머리핀이었다. 너는 차갑고 서툰 마음만을 담은 금속만을 남기고 정말로 가버리고 말았다. 일 년의 시작을 알리는 짧은 봄처럼, 곧 눈부신 여름이 올 거라 손가락으로 저편을 가리키고 정작 너 스스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져버리고 말았다. 봄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여름이란 빛나고 찬란한 시간이 아니라, 그저 덥고 고통스러운 사막과 같은 시간이라는 걸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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