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恋歌

 

及川 徹 x 月島 蛍

오이카와 토오루 x 츠키시마 케이

 

 



1

 


  “따님의 성인식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수십 번은 족히 들었을 법한 인사치레였다. 깊은 눈매를 가진 어두운 금발의 중년의 남성이 곱게 마시고 있던 찻잔을 무릎 앞에 내려놓았다. 고운 비단으로 의중을 숨긴 두 사람의 잔 옆에 결 좋은 검은 머리에 입가에 미인점이 인상적인 소녀의 눈꺼풀이 얌전했다. 소녀가 옥주전자에 손을 가져가자 금발의 남자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다들 기대가 크시니 실망시킬까 걱정입니다.”

  “츠키시마 공이 걱정도 하십니까?”


  남자의 맞은편에 앉은, 멋들어지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껄껄 웃고 말을 이었다. 그는 소녀가 찻잔을 다시 채우는 걸 물리지 않았다.


  “아들도 훌륭히 장성하셨으니, 그 따님은 안 봐도 알지 않겠습니까. 무얼 걱정하시는지 저는 알 수가 없군요.”


 툭 두드러진 아부에 츠키시마 공은 슬며시 오르는 입 꼬리를 잡아 내렸다. 걱정이 뭔지 알 수가 없어서 여자 심복을 보내 염탐을 한단 말인가? 츠키시마 공이 성인식조차 치르지 않은 귀한 딸을 귀애하다 못해 과보호 한다는 소문과 함께 소문의 영애를 훔쳐보고자 하는 잔수법 따위가 판을 쳤다. 권태로운 가진 자들의 꽤 공들인 작업에도 츠키시마 가문의 아씨는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형체를 알 수 없는 귀엣말들만 발 없이 바쁘던 참이었다. 

  공이 미동 없이 앉아있는 소녀, 시미즈를 흘깃 보았다. 시미즈는 츠키시마의 비밀을 들춰내기 위해 접근하는 이들을 직접 보아온 시동이었다. 그녀는 세 사람이 앉은 방에는 최소한의 흥미만 남긴 채 내려진 발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들었느냐.”

  “예.”


  남자가 돌아간 뒤 촘촘하게 짜인 발을 올리는 것도 시미즈의 역할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남자의 물음을 받은 건 발 뒤에 앉아있던 소년이었다. 공처럼 이른 가을 금빛의 짧은 머리를 갖고 있었지만 눈만큼은 수확이 끝난 뒤 내린 찬 서리가 내려 있었다.


  “대역 후보는 여럿 찾아 두었다.”


  서양에서 최근 보급되기 시작한 안경을 쓰고 있는 공의 아들, 츠키시마 케이가 이번엔 입을 열지 않았다. 첫 대답도 꽤나 건성이었는데 이젠 대답조차 하지 않는 아들이었지만 공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츠키시마 호타루를 고르는 마지막 선택권은 네게 주마.”


  성은이 망극하다며 머리라도 조아려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츠키시마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비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도 상대는 친아버지였다. 츠키시마는 제 아버지를 싫어하진 않았다. 날선 말로 헤집어 버리고 싶은 건 날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속해온 현실이었다.


  츠키시마 공의 슬하에는 자식이 둘 있었다. 아니, 츠키시마 가문에는 늘 자식이 둘이었다. 달빛을 받아 신성하게 여겨지는 츠키시마 가문의 주술이라 불릴 정도로 늘 첫째는 아들이었고 둘째는 딸이었다. 장자는 대를 잇고 나라에 무신으로 이바지했고, 역사에 그 이름을 새긴 일은 적지 않았다. 특별히 집에서 그들을 그렇게 교육한 것은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무예에 뛰어나 그들이 그렇게 자랐을 뿐.

  그러나 츠키시마의 성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두 번째로 태어나는 딸들 때문이었다. 무인들이라면 한 가문에서 뛰어난 이들이 배출 되는 일이 드물진 않았다. 가풍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는 영역이었으니까. 하지만 츠키시마의 딸들이 갖는 의미는 좀 더 특별했다. 그녀들은 카라스노에서 달에게 기원을 올리는, 일종의 신녀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신뢰받는 역사서에는 그녀들이 실제로 기원의 올려 달의 힘을 빌렸다는 전승도 기록되어 있었으니, 그녀들에 대한 전국적인 믿음도 아예 허상에서 기원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달의 힘’이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 살아 있는 이들 중에 직접 보았다는 이는 없었지만, 츠키시마의 딸이 나라 안에서 행해지는 온갖 행사들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당연한 관례였다. ‘마지막 딸’은 현재 가주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전설을 재현하진 못했어도 자주 얼굴을 비췄고 상냥한 성품으로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다.

  라고, 츠키시마 케이는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집안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많았다. 조부모의 대에 카게야마 선왕으로부터 받은 진귀한 보물들과 가보들. 제 아버지의 여동생, 자신의 고모가 전국적으로 사랑받아 달의 항아로 불렸고 불치의 병에 걸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둘째이면서 여자가 아니라는 것.


  “케이.”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시미즈를, 츠키시마가 그만큼이나 가만히 마주보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대외에 알려진 츠키시마의 자식들은 둘이었다. 형인 츠키시마 아키테루와 여동생인 츠키시마 호타루. 츠키시마 케이라는 이름은 세상에 단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존재하지 않는 선녀에게 밀려 세상에서 물러나 있었다. 

  어렸을 땐 소녀인 척 해야 했다. 머리를 길러 여러 사람들을 만난 적도 있었다. 유모와 어머니가 신신당부 했고 형이 손을 잡으며 걱정해주는 통에 철들기 전에도 무리 없이 자신의 역할을 해냈지만 부쩍 키가 크기 시작한 이후엔 손 쓸 방도가 없었다.

  사춘기가 올 즈음의 나이 이후로 성인식 전에 남 앞에 잘 보이지 않는 편이 좋다는 명분은 가문 내력의 묘한 신비주의와 맞물려 다행히 잘 먹혀들었다. 운이 좋아 국내외의 정세가 안정 되어 사람들이 먼 곳의 항아에게 의지하지 않은 덕도 컸다.  

  하지만 이제 남은 시간은 겨우 세 달 채 못 되었다. 츠키시마 호타루는 올 겨울, 수도의 성인이 되는 귀족 자제들이 한데 모아 열리는 성인식에 참석해야만 했다. 


  “네.”


  한참이 지나서, 그것도 시미즈가 넌지시 재촉해야 겨우 나온 대답이었지만 츠키시마의 아버지는 충분히 만족한 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자리를 뜬 후에도 츠키시마의 시선은 아버지의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생각이 아버지의 말에 머물러 있었다.

  대역이라. 츠키시마가 여자인 척 하는 선택지도 그의 부모님에게 진지하게 고려되었지만 그것만큼은 정말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츠키시마는 자신의 키가 보통 남자보다도 큰 편이라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혹시나 작았다면 가발이라도 쓰며 여자 행세를 해야 할 지도 몰랐으니까. 남자가 여장을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둘째치더라도 마지막 남은 존재의 자존심이었다. 츠키시마의 형, 아키테루가 동생의 뜻을 알아채고 변호해주지 않았다면 그저 키가 많이 큰 선녀가 됐을지도 몰랐다.

  피식. 스스로 떠오른 상상에 웃음이 나왔다. 찻잔을 정리하던 시미즈의 눈길이 제 쪽을 향하는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상상되는 이미지가 구역질나게 싫었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럼에도 농담이 아니라 진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어이가 없었다.

  츠키시마 케이가 츠키시마 호타루이길 거부해도 호타루의 자리는 비워둘 수 없었다. 호타루는 존재해야만 했다. 호타루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전 세계에 열 명이 겨우 알까하는 비밀이었다. 이를 위해 집의 식솔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나라를 이끄는 힘은 때론 왕일 수도, 강한 무인일 수도, 둘 다일 수 있었지만 적어도 ‘카라스노’의 민심을 받치는 기반은 츠키시마의 장녀였다. 케이의 존재를 숨긴 것은 둘째 아이가 음기를 받지 않은 사내라는 게 알려지면 흉흉한 소문이 돌까 우려한 츠키시마 공의 처사였다.

  그 존재의 무게를 알기 때문에 진작 동의한 대역 선정이었다. 대역이라는 단어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건 호타루의 대역이지 케이의 대역이 아니었다. 호타루의 배역을 정하는데 츠키시마 케이가 관여할 부분이 있는 걸까. 얼굴도 본 적 없는 그녀에게 연민과 거부감이 동시에 들었다. 츠키시마가 호타루에 대해 생각할 때는 늘 두 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감정이 함께 떠올랐다. 

  차가 담긴 옥주전자는 이미 차갑게 식은 후였다. 차는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도, 어쩐지 입술엔 식어버린 탁한 물의 한기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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