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민의 숙면 효과

세미 에이타 X 시라부 켄지로 (센티넬버스au)

세미시라 합작 (http://lol.ncity.net/smsr/) 참여글





  세미 에이타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옥상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선 세미의 몇 걸음 앞으로 옥상 바닥이 대략 세 층 아래까지 무너져있었다. 이미 천장이고 바닥이고 구분 없는 난장판 속에서 자욱한 먼지가 무너진 공사용 잔해들 위로 피어올랐다. 평범한 사람이 이 밑에 있었다면 깔려 죽고도 남을만한 사고였다. 아니, 이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잘못하면 타겟 죽었겠다.”

  “이 정도로 죽으면 포획할 가치도 없습니다.”


  문제의 사건을 일으킨 시라부 켄지로가 세미의 말을 일축했다. 이 자식, 선배를 선배로 보긴 하는 건가. 세미가 짜증스레 혀를 찼지만 시라부의 행동을 이 이상 저지하지는 않겠다. 어쨌든 자신은 만일의 사태를 위해 함께 왔을 뿐이었고 임무의 주축은 시라부였다. 자욱한 먼지 안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 시라부가 어깨에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를 들쳐 매고 도로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십 분 남짓이었다.


  “이 녀석 맞아?”

  “맞습니다. 좀 받아주세요.”


  정신을 잃은 분홍 머리 남자를 어정쩡하게 세미에게 떠넘긴 시라부가 난간으로 건너오자, 시라부가 엘리베이터처럼 타고 올라온 금속 잔해가 아래로 추락했다. 아까보다 조금 발개진 시라부의 얼굴을 흘끗 본 세미가 무어라 하려던 말을 꾹 참고 건네받은 남자를 꽉 붙잡았다. 지금은 대기조와의 합류가 우선이었다. 시라부도 마침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가타부타 부연설명 없이 난간의 로프에 걸린 하강장치를 허리에 묶었다.


  세미와 시라부가 세이죠의 하나마키 타카히로를 포획해 오는 임무는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성공이라고 도장 찍혀 지나간 일에 세미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문제였지.


  “욥. 에이타 군. 오늘은 뭣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나?”

  “시라부랑 다녀오면 수명이 준다, 줄어.”


  임시 휴게실 의자에 몸을 걸어놓은 세미를 향해 인사를 던진 텐도가 키득키득 웃었다. 샤워라도 하고 온 모양인지 수건을 목에 걸고 있던 텐도가 세미에게 미리 꼭지를 딴 콜라를 건넸다.


  “애인 아냐?”

  “아, 맞는데…….”


  목으로 꿀꺽꿀꺽, 콜라를 넘기는 세미가 곧장 뒤따르는 트림을 겨우 속으로 삼켰다. 텐도가 다른 나무 의자를 끌어다 세미의 앞에 앉았다. 텐도가 등받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괴는 동안 세미는 한숨을 삼켰다.


  “나야 센티넬이 아니니까 잘 모르지만, 그 녀석 좀 위험한 거 아냐? 이번에 건물 반을 혼자 날려버렸다고.”

  “켄지로 생각보다 과격하니까 말이지~.”

  “그냥 과격하다고 넘길 수 있으면 좋겠다만.”


  또 다시 한숨이 말끝에 걸렸다. 텐도의 말마따나 일단은 연인이기에 걱정되는 사안이었다. 시라토리자와의 센티넬은 특별하다곤 하지만 다른 센티넬들과는 또 다르게 특히 불안정한 시라부였다. 마음대로 능력을 쓰다가 언제 어디서 몸이 망가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또 기껏 걱정해주면,


  “입이 이만큼 나와서 대꾸도 안한다고! 진짜 귀엽지 않아!”

  “언제는 귀여워 죽겠다고 해놓고.”

  “아, 그건 그거고!”


  오늘의 에이타 군은 짜증 120퍼센트? 깐족거리다 결국 한 대 맞아도 텐도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쪽에선 나름 심각한 고민을 털어놨는데 상대의 반응이 미적지근하니 되려 민망해져 세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에이타가 있으니 상관없지 않아? 일단 우리 가이드고. 네가 걱정하는 그 만일을 위해서 붙어있는 거잖아.”

 “내가 그 녀석이랑 각인 한 것도 아니고.”


  센티넬은 상당히 유용한 무기인 동시에 언제든 같은 편을 향해 역풍이 불 수 있는 양날의 검이었다. 그 위험 수를 줄이기 위해 가이드가 함께하는 거지만, 전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건 아니니 위험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다. 특히 세미 에이타와 시라부 켄지로의 경우는 더 그랬다. 두 사람의 불협화음은 세미의 탓이라기보다, 정확히는 시라부의 센티넬적 성질이 독특한 거였지만.

  그래도 세미는 될 수 있는 한 시라부의 옆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센티넬의 폭주에는 최소 반경 4km 안 모두의 안위가 걸려있었지만 세미의 걱정 한가운데는 언제나 시라부의 차지였다. 자기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주한 센티넬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죽어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세미였다. 시라부만큼은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세미. 텐도. 여기 있었나?”

  “아, 와카토시.”

  “포로가 깨어났다. 심문하러 가야하니 15분 후엔 모여 있도록.”

  “예이, 예이~.”


  우시지마의 딱딱한 출현에 텐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원래 자리로 가볍게 밀었다. 손만 대충 흔드는 세미를 유심히 본 우시지마가 그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시라부가 스가와라에게 약을 처방 받는다고 하더군.”

  “겍.”


  에이타, 이상한 소리~. 끝까지 웃음을 남기며 방을 나서는 텐도에게 시원하게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준 세미가 우시지마에게 반문했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 모른다. 스가와라가 전해달라고 하더군.


  점점 더 미궁이다. 시라부가 센티넬로써 불안정하긴 했지만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감기? 몸살? 외상? 다쳤나? 아닌데. 곰곰이 생각해도 특별히 짚이는 데가 없었다. 아픈 데 일부러 숨기는 거라면……. 불가능한 가정은 아니었으나 묘하게 짜증이 일었다. 하여튼 귀염성 없는 자식이라니까. 툭 내뱉은 세미의 혼잣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한 것은 우시지마 뿐이었다. 늦겠다, 가자. 그 전에 할 일은 해야지. 없는 상대를 향해 짜증을 내봤자 바보가 되는 쪽은 세미였다.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세미는 겨우 솟구치는 감정을 갈무리하고 휴게실을 나섰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시라부가 열다섯 살, 세미는 스무 살이었다. 비쩍 마른 채로 제대로 된 옷이라 볼 수 없는 환자복을 입고 있는 시라부는 많이 쳐줘도 초등학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신체와 반항적인 눈빛을 갖고 있었다. 세상 모든 불행을 끌어안아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잔뜩 털을 세우는 고슴도치 같았다. 세미도 가히 좋은 성장배경을 가진 건 아녔지만, 시라부에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동정이었다. 제대로 손질 되지 않은 삐뚤어진 앞머리만큼이나 시라부를 비뚤게 만든 세상이 나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랬다.

  시라부의 모난 성격에 세미가 두 손 두 발 다 든 것은 일 년이 지난 후였다. 시라부의 건방짐은 지독한 사연 때문이 아니라 그냥 태생이 그런 거라고 단정 지은 건 시라부가 유독 세미에게만 버릇없이 굴어서가 아니라, 우시지마에게만 살갑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텐도나 나이가 비슷한 카와니시에게도 세미만큼 까칠하게 굴진 않았다. 이쯤 되니 살살 약이 올라 세미도 어른스럽지 못하게 처신 했고 세미 스스로도 자신이 시라부 앞에선 울컥 어른스럽지 못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다.

  변화는 언제나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시라부가 나오는 꿈을 몇 번짼가 꾸고 난 뒤 우시지마가 시킨 임무를 행하던 중 문득 깨달았다. 계기는 사소했다. 혼자 서있는 시라부의 뒷모습이 홀로 울던 꿈속의 모습과 겹쳐졌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향해 팔을 뻗어 끌어안은 건 오직 세미의 선택이었다. 사소한, 아주 사소한.

  충동에 시라부 또한 충동으로 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그럭저럭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특별히 연인이 되었다고 시라부가 세미에게 다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사람과 사람을 묶는 연인이라는 명칭은 참 신기해서, 한 발 더 상대의 뒷모습을 좇게 만들고 조금 더 상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미는, 자신이 변하지 않는 시라부의 그런 태도에 흠뻑 빠졌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세미 왔……어?”


  그러니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화가 난다고! 좋아하는 건 확실한데 귀엽지 않다는 생각도 진심이다. 심문 겸 회의가 끝난 뒤 곧장 스가와라의 연구실로 향한 세미의 표정에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스가와라가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돌리다가, 바로 눈에 세미의 얼굴을 보고 미묘하게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시라부 얘는 왜 또 여기서 자?”

  “거기 담요 있으니까 덮어줄래?”


  스가와라의 손가락을 따라 옷걸이에 걸려있는 남색 담요를 시라부에게 덮어준 세미가 조심스럽게 시라부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과 나무 의자가 딱딱해서 일어날 법도 한데 미동도 없이 잠에 빠진 게 신기할 정도였다. 갈색 머리칼로 뻗어가던 손이 허공에 멈춰 시라부의 머리맡에 놓인 하얀 약통 뚜껑에 머물렀다. 플라스틱 재질의 약통은 세미의 한 손에 쏙 들어왔다. 겉면에는 특별히 약의 이름이나 효능을 나타내는 인쇄지 대신 임시로 붙인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그 위엔 손 글씨로 수면제라고 적혀있었다.


  “뭐, 자고 있어서 다행인가. 약 얘기 듣고 온 거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전해달라고 했다며?”

  “내가?”


  되려 눈을 크게 뜨고 반문하는 스가와라에 세미도 잠시 당황했다. 와카토시가 그랬는데? 우선 손에 닿은 수면제를 집어 들었다. 약이라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래서 시라부한테 준다는 약이 수면제냐?”


  차라리 감기약이 나을 뻔 했다. 센티넬 능력의 기본은 오감의 발달이라 일반인들이 쓰는 약물을 사용한다면 부작용이 올 위험이 컸다. 쉽게 말해 약 한 알을 먹었을 때 일반인은 딱 그만큼의 효능을 얻는데 비해, 센티넬은 약 열 알 이상의 부담을 몸에 지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그런데 수면제라니? 자리에서 일어난 세미의 눈이 위협적으로 가늘어졌다. 스가와라가 꿍꿍이가 있는 건가?


  “우리 센티넬을 재워서 뭘 할 생각이야?”

  “으음. 그러니까, 세미.”

  “너, 포로라고? 와카토시가 자유롭게 연구하도록 내버려두라고 했지만, 이 녀석이 여기서 감시하는 것도 다…….

  “그거 수면제 아니야.”


  날카로운 추궁이 스가와라의 큰 미소에 막혔다. 세미가 눈을 끔뻑이며 스가와라의 얼굴과 손에 들고 있던 약통을 번갈아 보았다. 수면제가 아니라고?


  “그냥 비타민이야.”


  머릿속에 정보의 파편이 쉽게 맞춰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스가와라는 시라부에게 수면제라고 스티커가 붙여있는 약통을 줬고, 시라부는 그걸 먹고 잠들었는데, 사실은 그게 수면제가 아니라 비타민이다……. 어떻게 된 사정인진 몰라도 세미는 스가와라에게 사과해야할 의무를 강하게 느꼈다.


  “요즘 잠을 잘 못 잔다고 하더라.”


  다행히도 선수를 친 쪽은 스가와라였다. 스가와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간이 냉장고 옆의 수납장 위에 올려둔 커피포트에 물을 올릴 때까지 세미는 할 말을 고르지 못했다. 도로 의자에 앉아 시라부를 보는 세미를 곁눈질로 확인한 스가와라가 부드럽게 눈웃음 지었다. 물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따라 흘렀다.


  “많이 힘든 거 같던데.”


  스가와라에게 시라부가 무슨 얘길 했는지 모르겠지만, 세미는 시라부가 스가와라에게 속내를 툭 열어놓고 얘기한 건 아니라고 확신했다. 시라부의 성격을 알기 때문만이 아니라, 스가와라의 귀신같은 통찰력을 인정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스가와라는 시라토리자와의 포로였지만 내적으론 서로 득이 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스가와라 특유의 부드러운 성격까지 더해져 실제로 그가 접촉하는 시라토리자와의 인원들은 대부분 그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굳이 그를 한 단어로 콕 집어 표현하자면, 양호 선생님이라고 할까.

  테이블에 턱을 괸 세미가 고개만 돌려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언쟁 아닌 언쟁이 오갔는데도 세상모르고 잠든 걸 보면 정말 달게 잔다 싶었다. 바꿔 생각하면, 얼마나 밤에 잠을 못 잤기에 한 낮에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지 걱정이기도 했고.


  “비타민 먹으면 원래 잘 자?”

  “그럴 리가.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야.”


  김이 올라오는 커피포트의 전원을 내리고 스가와라가 커피잔에 물을 부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세미의 앞에 다정한 소리를 남기고 내려앉았다. 스가와라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한 세미가 머그잔을 쥐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플라시보. 마음에 들도록 한다, 는 라틴어의 뜻으로 가짜 약을 진짜 약인 것처럼 속여 환자가 그 효능을 믿어 실제로 기대한 효과가 나타난다는 게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쯤은 의학 쪽 지식이 전무한 세미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라부는 스가와라가 준 비타민을 수면제라고 믿고 먹어서 푹 잔다는 거였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너머에 갈색의 동그란 머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진한 아메리카노를 몇 모금 넘기지 못한 세미가 커피 향이 남은 손을 뻗어 찬찬히 시라부의 머리를 쓸었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잠을 못자냐.”


  제 몫의 커피를 들고 모니터 앞에 앉은 스가와라가 살풋 웃었다. 진심이 담긴 그 물음이 저에게 향하지 않은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스가와라는 시라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세미를 방해하지 않았다. 한가로운 오후였다.


  시라부가 눈을 뜬 건 저녁시간 남짓이었다.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테이블에서 일어난 시라부가 아픈 소리를 내며 허리를 붙잡고 도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모습을 보며 세미가 쯧쯧, 혀를 찼다.


  “어째 그런 자세로 두 시간을 잔다 싶었다.”

  “세미 선배가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여기 있으면 안 되냐?”


  그건 아니지만. 시라부가 툴툴거리며 다시 천천히 허리를 세워 앉았다. 잠들어 있을 땐 몰랐지만 아무래도 허리에 부담이 가는 자세였다. 저릿저릿한 팔도 통증을 호소하는 통에 차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 끝만 겨우 까딱까딱 움직이는 시라부를 보던 세미가 덥석 시라부의 손을 붙잡았다.


  “악!”

  “가만 있어봐. 이래야 피가 통해서 빨리 풀려.”


  세미가 시라부의 손과 팔을 주무르는 동안 시라부는 이렇다 할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흘렸다. 반쯤 장난으로 시작했던 세미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됐지? 시라부가 끙끙대지 않자 세미가 슬쩍 잡았던 팔을 놓았고 시라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스가와라 씨는?”

  “어, 나갔다온대.”

  “그걸 왜 세미 선배가 정합니까?”

  “이 자식 봐라. 나 네 선배거든? 감시 중에 낮잠 잔 건 누군데?”


  시라부가 눈빛으로 항변했지만 낮잠을 들먹이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세미만큼이나 시라부도 스가와라가 행적이 묘연해지는 일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더 이상의 언쟁은 불필요 했다. 시라부가 한숨을 쉬었다. 탁자에 두었던 약통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건 그 다음이었다. 


 “수면제 찾아?”


  방을 샅샅이 뒤지는 시라부의 눈길에 세미가 손가락을 딱딱 맞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자연히 시라부의 이목이 세미에게 집중 됐다.


  “잠 못 잔다며?”

  “스가와라 씨입니까?”

  “어디 안 좋아?”

  “세미 선배가 무슨 상관인데요.”

  “나 네 애인이거든?”


  답답한 듯 토로한 한 마디에 시라부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움찔했다. 싫다기보다 적응이 안 됐다.


  “애, 애인…….”

  “맞잖아?”


  시라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세미가 한숨을 쉬었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막연히 답답한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저는 애인이라고 내세울 형편이 못 되었다. 시라부는 수면제를 찾을 정도로 밤마다 웅크리고 있었는데, 자신은 시라부와 크고 작은 갈등이나 일으키고 있었다. 무리 한다고 투덜대기나 하면서. 직접 나서서 도움은 못 되는 주제에.


  “힘들면 말을 해. 넌 옛날부터 그러더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며 앞에 앉아 있는 시라부가, 몇 년 전 처음 시라토리자와에 데려와진 어린 열다섯 살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타인의 손을 믿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독방에서 발악하던 어린 녀석이 잘도 여기까지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선 꼭꼭 숨어있었다는 걸 깨달으니 마음이 아렸다. 힘들겠지. 


  “……삼켜지는 꿈을 꿔요.”


  어렵사리 운을 뗀 시라부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결국 센티넬의 부담은 센티넬 자신이 진다. 가이드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지 못하는 시라부의 경우엔 그 부담이 다른 센티넬보다 몇 배는 됐을 터였다. 시라부가 시라토리자와에 오기 전에 받았던 손가락질은 화살보다 날카로웠다. 불량품 센티넬. 열다섯 소년이 등에 이고 있던 오명이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광기에 삼켜진다.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두려워하는 와중에 만난 시라토리자와는 시라부에게 남은 유일한 피난처였다. 우시지마의 강함에 매료되어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 생각했어도 까딱하면 자신의 힘에 삼켜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성인이 되지 못한 소년이 떨쳐내기엔 현실적으로 너무나, 잔혹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을 오직 제 발걸음으로 딛어야하는 감각을 세미는 온전히 알지 못했다.


  “시라부.”


 그게 안타까웠다. 나는 네 두려움을 전부 알 수 없어. 네가 말해주지 않는 탓도 있지만, 아마 말한다 해도 평생 전적으로 공감할 순 없을 거다. 진짜 센티넬과 가이드는 일말의 감정도 공유할 수 있다던데. 우리의 관계는 만나기 전부터 이미 철저히 망가질 대로 망가져 기적을 바랄 수 없었다. 네 감정을 가슴 깊이 함께 느낄 수 없는 게 지금만큼 아픈 적이 없었다. 너는 이것보다 훨씬 괴롭다는 걸 알아서, 더욱.

  세미의 손이 시라부의 손을 찾아 쥐었다. 쥐가 다 풀렸을 텐데도 시라부는 세미를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이렇게 적막한 공기가 흐른 적이 몇 번이나 됐을까.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온기가 전부였다. 세미는 시라부의 손이 이렇게 차가웠다면 종종 잡아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자.”


  세미의 손이 떠나간 자리에 남겨진 걸 확인한 시라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손바닥에 가득 차는 하얀 약통이었다.


  “어쨌든 임시라도 의사가 처방해준 거니까, 나쁜 건 아니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플라시보라도 효과가 있는 쪽이 이득이었다. 물론 그 얘기를 직접 말로 꺼내진 않았다. 흠흠. 멋쩍게 세미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대로 너그럽고 사랑하는 선배의 모습으로 끝나면 좋았을 텐데.


  “선배는 바보입니까?”

  “뭐?”

  “이젠 글렀어요. 선배 때문에 다 망했다구요.”


  시라부가 신경질적으로 약통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잠시 동안 어이가 없어 넋을 놓은 세미가 왈칵 언성을 높였다.


  “너! 이, 내가 걱정해서……!”

  “이거 수면제 아닌 거 안다구요. 모른 척 했는데 선배 때문에 다시 생각나서 진짜, 이제 소용없잖아요.”

  “하?”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어이없음의 2차 폭격을 맞은 세미가 멍청히 시라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뭣 때문인지 시라부는 훨씬 개운한 모습으로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잠시나마 잡았던 연인의 분위기가 일말의 티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산산조각 나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책임지세요. 애인이라면서요.”


  똑바로 꽂혀오는 시선이 당돌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내가 너랑 로맨스 영화 찍어서 뭐하겠냐. 로맨틱은커녕 정말 귀엽지 않은 시라부 켄지로. 힘들다고 안겨오기보다 꼿꼿하게 턱을 쳐들고 자존심 끝의 끝까지 가시로 이루어진 시라부 켄지로. 수백 번 귀엽지 않은 모습이면 어때. 수천 번 좋아하게 됐는데.


  “잠이 안 오면 나한테 와.”


  이쯤 되면 중증이지. 멋쩍은 미소가 세미의 입가에 슬며시 걸렸다. 네 말마따나 나는 네 애인이니 이 정도 제안은 할 수 있었다. 네 잠을 끌어 고민을 해결해줄 수면제는 못 될지언정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도움은 될 수 있는 비타민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두운 방안에서 혼자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는 것보단 누군가 함께 있어주는 게 훨씬 나을 터였다. 꼭 그게 아니라도, 시라부가 그런 밤들을 보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세미는 혼자 그를 내버려 둘 위인이 못 됐다.

  세미가 손을 뻗었고 이번엔 시라부가 동시에 손을 마주 내었다. 세 번째 맞닿은 손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마냥 그 촉감이 좋아 그대로 제 쪽으로 당겨 손등에 입을 맞췄다. 언젠가 네 뒷모습을 끌어안았던 것처럼 나는 영영 네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충동적일 테지. 열 번의 말다툼 끝에 찾아올 한 번의 충동이면 됐다. 그거면 충분해. 그건 열 개의 계단을 오르는 즐거움을 찾는 첫 번째 발걸음이니까. 네가 수많은 밤을 혼자 보내다 나와 함께 잠들 밤을 찾아온 것처럼.

  불량품이래도 좋았다. 너와 내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도, 내가 네게 효과적인 처방이 아닐 지라도 너는 언제까지고 연인의 품에서 비타민을 수면제라 속이며 안겨있을 걸, 나는 알았다. 꽉 붙잡고 놓지 않는 네 손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오늘 밤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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