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거리 (Side I)

마츠카와 잇세이 x 이와이즈미 하지메




  너와 나는, 우리라는 단어로 묶기엔 넓고 어두운 길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오이카와나 다른 녀석들을 한 데 묶어 세이죠라는 팀에 넣는 건 괜찮았지만 마츠카와 잇세이와 이와이즈미 하지메의 둘 뿐인 우리는 싫었다. 그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저 좋은 팀메이트이자 친구라고 웃으며 지내면 될 일이 언제, 왜 이렇게 틀어진 걸까. 생각만 해도 심장이 한 쪽부터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첫 관계는 손쓸 틈도 없이 치러졌다. 합숙 도중이었다. 그 날 하루 종일, 이와이즈미는 마츠카와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묘하게 정신이 딴 데 가있는 느낌. 서브를 해도 날카롭지 않았고 블로킹을 뛰어오르는 위치나 박자도 애매하게 틀렸다. 쿠니미를 지적하기 좋아하는 코치가 마츠카와의 이름을 부를 정도였으니 그의 상태를 눈치 챈 건 비단 이와이즈미 뿐만이 아니었을 터였다.

  어딘가 불편한 듯 제 허벅지를 짚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마츠카와를 네트 너머로 봤을 때, 이쪽으로 똑같이 꽂혀오던 강한 시선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시선을 다시 마주 한 건 엉뚱하게도 한밤중 화장실 앞에서 마주쳤을 때였다.


  ‘일부러 피했는데 왜 찾아오고 그래.’


  나더러 어쩌라고. 그때 마츠카와는 그렇게 한탄 했었다. 이와이즈미는 자던 중에 목이 말라 화장실 앞 정수기에 물을 가지러 갔고, 물 쏟아지는 소리에 화장실에 누가 있나 들여다보았을 뿐이었다. 반쯤 나간 조명이 비추는 마츠카와의 눈빛은 한층 더 어두웠다.


  ‘네 탓이야.’


  이와이즈미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이 바닥끝까지 추락했다. 마츠카와가 이와이즈미의 손목을 붙들고 멋대로 끌어당긴 탓이었다. 저항할 틈도 없이 부딪힌 입술이 말캉한 혀를 꺼내 이와이즈미의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와중에도 허리를 안고 한 겹 티셔츠 안으로 침범하는 손이 차가워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만 두라고 저항하려는데, 어느새 바지 안으로 들어온 억센 손이 급소를 억지로 깨우는 바람에 목소리 하나 낼 수 없었다. 왜? 어째서?

  이와이즈미가 화장실 칸 안에 억지로 구겨 넣어진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마츠카와를 향해 시원한 표정 하나를 지을 수가 없었다. 얼굴 근육이 빳빳하게 긴장했고 손이 갈 곳을 잃은 것처럼 허공에서 표류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지. 어디가 안 좋으냐고 묻는 오이카와의 질문 속에서도 이와이즈미는, 마츠카와의 거친 키스가 이 한 번 부딪히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렸다.

  마츠카와에게 대학생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나마키가 가장 떠들기 좋아하는 주제였고, 부실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남 고생들의 ‘여자’에 대한 주제에 이와이즈미가 굳이 빠진 적도 없었다. 누가 괜찮더라, 오이카와 팬클럽 애들 중에 예쁜 애가 있더라, 오이카와는 왜 차였을까, 그러고 보니 마츠카와 애인이 연상이라며, 매번 비슷하게 흘러가는 주제에 싫어도 알게 되는 있는 정보들은 참으로 영양가가 없었다. 그러냐, 잘 사귀나 보네, 좋대냐, 같은 대꾸면 족했다. 합숙 전에는 그랬다.

  실수라고 생각하면 아무 말 없이 넘길 수 있었다. 마츠카와가 사과를 하거나, 혹은 하지 않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지낸다면 자신도 시간을 갖고 잊어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따라붙는 시선은 더욱 집요해졌다.

  두 번째는 아무도 없는 부실, 세 번째는 방과 후 체육 비품실. 이와이즈미를 끌어당길 때마다 마츠카와는 이와이즈미의 탓이라 말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피차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된 것은 마츠카와의 강요 아닌 강요 때문인지, 이와이즈미의 순종 아닌 순종 때문인지, 섞인 살만큼이나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마츠카와보다 특별히 힘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강간하는 사람은 평소의 몇 배의 힘이 나온다는 속설이 있긴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자신이 마츠카와에게 이기지 못하는 이유를 스스로도 특정하지 못했다. 소문나는 게 두려워서? 마츠카와는 단 한 번도 협박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마츠카와를 볼 때 협박보다 더 검고 질척한 응어리를 마주했다.


  “너랑 이제 안 해.”


  무서웠다. 녀석의 손이 닿을 때마다 몸 어딘가에서 까맣고 찐득한 액체가 묻어 열에 찬 손바닥과 찬 피부 사이를 끈끈히 붙게 만들었다. 언제나 손목에서부터 시작하는 검은 침식은 팔을 타고 어깨로 올라와 목과 숨통을 틀어쥐었다. 영락없는 사람의 늪이었다.

  그래서 밀쳐 냈다. 사실 진작 그랬어야 하는 일이었다. 저 새끼가 같은 팀원을 육욕으로, 여자 친구도 두고 탐하는 변태 새끼입니다, 하고 몰아세우며 왜 그랬냐고 추궁했어야 했다. 그렇게 한다면 과연 마츠카와가 어떻게, 평소 같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검은 웃음을 지을지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하고 있다는 데서 이미 모든 게 틀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손을 뻗어오는 마츠카와를 마냥 둘 순 없는 일이었다. 마츠카와는 여자 친구가 있었고, 만일에 하나 없었다 치더라도 둘 사이엔 로맨스로 분류할 절절한 감정선 따윈 하나도 없었다. 그저 없었다. 아무 것도.

  마츠카와를 뒤로 한 채 박차고 나오는 등이 아팠다. 울컥하는 마음에 아무렇게나 휘둘러버린 손등도 아렸다. 젠장. 주먹을 꾹 쥔 이와이즈미가 향한 곳은 옥상이었다. 홧김에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온 곳이 오이카와와 하나마키, 그리고 마츠카와와 종종 점심을 먹던 옥상이라는 것에 대해 이와이즈미는 헛웃음을 흘렸다. 피해서 도망을 와도 하필 녀석의 흔적이 남은 곳이라니. 생각해보면 교내에서 마츠카와와 머무르지 않았던 장소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지 몰랐다. 배구부 같은 학년, 같은 주전으로서 오이카와와 하나마키와 함께 넷이 몰려다닌 빈도수도 그랬고, 합숙 이후 꽤 오랫동안 교내에서 살을 섞은 장소도 그랬다.

  가슴이 답답해져 닫은 옥상 문에 기대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도 잡혔던 손목은 여지없이 찐득한 검은 응어리를 남긴 채였다. 뒤늦게 홧홧하게 올라오는 열이 식지 않은 분노 때문인지, 검은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올려다본 하늘이 우습게도 맑았다. 뻥 뚫린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고나서야 오늘 바람이 강하다는 걸 눈치 챘다.


  “……춥네.”


  허탈한 한 마디가 스르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여긴 추워. 심장까지 잠식한 그늘이 긴 혀를 빼어 미소 지었다.

  별 탈 없이 지나간 부 활동 후에 무언가 다가올 것을 이와이즈미는 예감하고 있었다. 유니폼을 갈아입는 동안 느껴지는 시선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이란 언제나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매일 아침마다 챙겨보시는 일일 드라마가 그렇듯. 교문을 나서는 여학생의 책가방 속 로맨스 소설이 그렇듯.


  “이와이즈미.”


  가방을 챙겨 부실을 나가려는 이와이즈미의 목덜미를 마츠카와의 나른한 목소리가 잡아챘다. 부실의 문과 정 반대 쪽에 있는 의자 사이의 거리. 문을 열고 나가면 그만인데, 그 이상의 거리를 벌리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한탄하며 이와이즈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종일 일부러 외면했던 마츠카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랑 이제 안 해?”


  ‘너’가 ‘나’로 바뀌어 질문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심장이 철렁했다. 마츠카와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눈앞에 검은 물이 일렁였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

  “마음에 안 드는 게 당연하지 않냐?”


  마츠카와의 눈이 가늘어졌고 이와이즈미는 그의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 자식, 이렇게까지 뭔가 어긋나 있었나. 3년을 꼬박 알면서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는 속내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 그 당연한 걸 여태 모른 척한 너는.”

  “…….”

  “너는?”


  죄를 알면서도 묵인하면 묵인한 시간만큼 공범죄가 적용된다. 마츠카와는 이와이즈미가 피해자라는 걸 부정하지 않은 채 오히려 그를 공범자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목도한 사실 앞에 할 말이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시선으로 자신과 마츠카와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어림짐작 했다. 남자 고등학생의 발걸음으로 네 걸음하고 반. 딱 그 정도였다.


  “이와이즈미.”


  한 걸음 앞에 낯선 이름이 검게 떨어졌다. 


  “나가지 않을 거지?”


  두 걸음 째에 은근한 강요가 발칙한 예견에 스며들었다.


  “너는.”


  세 번째 부름을 등질 출구는 있었으나 한 걸음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러지 않을 거야.”


  네 번째의 확신에 첫 키스가 떠올랐다. 네가 옳았다. 강압 속에 섞여있던 능숙한 입맞춤 하나를 이겨내지 못한 내 탓이었다. 어긋난 건 나였고, 다 큰 사내 놈 넷이 몰려 다녀도 네게 눈길을 주었던 사람도 나였고, 네 시야에 들어가기 위해 악착같이 인상을 쓴 것도 나였고, 너의 변화를 세심하게 알아차린 것도 나였다. 얼굴만 아는 네 여자 친구를 질투한 것도 나였고, 점심시간 둘러 앉아 항상 네가 가장 먼저 집는 반찬이 잘라 놓은 햄버그란 걸 안 것도 나였다. 네가 처음 말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내 잘못이었다.

  너와 나의, 그 검은 거리는 사실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어두운 거리를 눈대중으로 재며 여름에는 비를 뿌리고 겨울에는 눈 내리게 해 곱게 진창을 만들었다. 너 걸어올 길에 나는 꽃길 대신 진창길을 만들어 스스로 빠져들고 네가 어디까지 나를 지켜볼지를, 즐겼다. 과연 너와 나, 우리의 장르는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로맨스? 스릴러? 범죄? 무엇이든 간에.

  반걸음. 남은 거리를 마지막으로 좁힌 사람은 이와이즈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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