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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28 [마츠이와<하나] 못다 핀 꽃


꽃이 진다고 그대를 

-번외; 못다 핀 꽃

마츠카와 잇세이 x 이와이즈미 하지메 ←하나마키 타카히로, 오이카와 토오루



추천 브금 ::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vocal by 한수연) - 그네

https://youtu.be/Rtfh-G1Mzk4





  기회는 기다리는 자의 것이라 했다. 술에 취해 울다 잠든 이와이즈미를 억지로 어깨에 매달고 방으로 데려가 눕힐 때도 하나마키는 그 옛말을 믿었다. 못생긴 얼굴이라 혼자 웃으며 눈물 자국을 닦아주다가 남모르게 잠든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을 때에도, 언젠가는 당당하게 네 눈을 보면서 입을 맞출 수 있을 거라 위안 삼았다. 술에 취해 마츠카와의 이름을 부르며 울던 이와이즈미를 보며 상했던 속도 잊을 정도로, 이미 하나마키는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그랬는데.

  그 날. 꽃이 예뻤고 베란다에 노랗고 파란 꽃의 바다가 몰아친 날. 하나마키는 이와이즈미가 열어 둔 베란다 문을 닫으려 바닷가에 기꺼이 발을 담갔다.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탐스러운 목련 꽃이 시야에서 점점 져가고 하나마키는 반쯤 문을 닫던 자리에서 그대로 멈추었다.


  -그래서 오늘 나가기로 했어?

  “어~ 다 쌌다. 근데 아무래도 월급 받고 옷을 너무 많이 산 거 같은……데!”


  어깨랑 볼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핸드폰을 끼워 넣은 하나마키가 빵빵하게 입을 벌린 스포츠 백의 지퍼를 닫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남의 속도 모르고 자꾸만 지퍼 사이로 옷이 끼는 바람에 일보 후퇴 후 이보 전진하는 작전만 십 수 번째였다. 젠장. 한숨을 쉰 하나마키가 손에서 가방을 놓고 핸드폰을 잡았다.


  “친구 좋은 게 좋긴 하다. 스타가 새벽에 전화도 해주시고.”

  -고마우면 우유 빵 보내주라. 여기 우유 빵이 없어서 오이카와 씨 조만간 우유 빵 부족으로 실려 갈 거야.

  “푸하하! 알았어, 알았어.”

  -꼭 아오바죠사이 고등학교 매점 산으로 보내줘!


  그건 좀 힘들 거 같은데.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댄 하나마키가 시원하게 웃었다. 여행용 가방 하나에 상자 두 박스, 지퍼 닫기를 포기한 스포츠 백이 하나. 정말로 나는 이 집에 눌러 살 생각을 했던 걸까. 웃음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입가에 감도는 미소가 참 썼다.


  -그리고 힘든 건 나누면 반이라잖아. 오이카와 씨는 주장이니까 맛키의 힘든 것쯤은 나눠 가져줄 수가 있어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녀석이 말은 잘 하시네요~.”

  -그게 내 특기잖아?


  오이카와의 뻔뻔함에 하나마키가 혀를 내둘렀다. 어련하시겠어. 고개를 뒤로 넘겨 천장을 보았다.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가 하나마키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쌌다.


  “역시 내가 너무 기다리기만 했나. 확 지를 걸 그랬나.”

  -맛키가 이와 쨩을 강제로 덮쳤으면 내가 비행기 타고 쫓아가서 때릴 건데?

  “그런 뜻 아니거든!”


  파렴치한 오이카와 같으니라고! 또 킥킥대는 농담 끝에 이번엔 한숨이 걸렸다. 긴 한숨과 짧은 침묵 끝에 말을 꺼낸 것은 이번에도 하나마키였다. 오이카와는 나름대로 무겁지 않은 분위기를 끌어보자 했겠지만,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는 덴 직구만한 게 없었다.


  “넌 어떠냐?”

  -솔직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되게 담담하네.”

  -이와 쨩이 좋다면 난 그걸로 좋아.


  하나마키가 오이카와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한 때는 가장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두 사람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이나 심적으로도 먼 곳에 있는 사람이란 기분이 들었다. 오이카와가 더 날뛰고 자신은 뒤에 물러나 팔짱을 끼고 있는 그림이 더 그럴 듯 해보였다. 누가 봐도 이와이즈미와 가장 가까웠고 욕심냈던 사람은 자신보다, 심지어 마츠카와보다도 오이카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마음속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사람은 하나마키뿐이었다.


  마츠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결별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마키는 안타까움과 쾌재를 부르고 싶은 충동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하나마키는 두 사람을 진심으로 아꼈지만, 두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확연히 다른 것을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에 대한 감정은 소위 사랑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었다.

  어떻게 남자끼리, 그것도 볼 꼴 못 볼 꼴 다 봤을 고등학교 동창생끼리 그럴 수 있냐고 묻는다면 하나마키는 그게 그렇게 되더라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학교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배구를 함께 하다 보니 친해졌고 하나마키도 그 이상은 없을 줄 알았다. 이와이즈미가 거칠어보여도 남들보다 마음이 따뜻하고 정도 많으며 상냥하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하나마키는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계절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사람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게 만드는 사람. 든든하고 의지가 되며 또 의지가 되어주고 싶은 사람. 하지만 상황은 잠시도 하나마키를 단 꿈에 젖어있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오이카와 또한 이와이즈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 하나마키는 묘한 수긍과 함께 고등학교 동창들 사이에 그어진 애매한 금을 느꼈다. 그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결속력임과 동시에 그 이상으로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기도 했다. 하나마키는 그 금에 순응을 했다면, 오이카와는 벗어나 먼저 이와이즈미를 붙잡고자 하는 쪽이었다.


  -벌써 완패했으니까.


  솔직히 밝히건데, 하나마키는 마츠카와가 가장 승산이 없다고 여겼다. 이와이즈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오이카와였고 그런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 고백하고 차인 뒤에 그 다음 차례는 당연히 자신이라고 여겼다. 이와이즈미의 다정한 행동이나 평범하게 신경써주는 말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그러다 오이카와의 고백을 계기로 마츠카와와 이와이즈미가 졸업 직전에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는 걸 알았을 땐 향할 곳 없는 진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오이카와는 고백이라도 했지, 자신은 무엇 하나 시도도 못해봤다는 허망함은 차마 말도 표현 못할 정도였다. 졸업식 날 두 번째 단추를 달라고 고백할까. 바보 같은 로맨스를 꿈꾸던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해 견딜 수 없는 스무 살을 보낼 정도였다.

  참 오래도 기다렸다. 미련하리만치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다. 특별히 원한 것은 아니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깨끗이 지우고 불장난 같은 마음으로 치부하고 싶었다. 사람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더라. 술자리에서 종종 튀어나오는 하나마키의 말버릇이었다. 마츠카와와 이와이즈미는 그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오랜 연애를 지속했고 하나마키는 속 좋은 친구의 얼굴로 이와이즈미의 놀라움을 받아낼 때마다 쓰려오는 속에 찬 술을 붓기 바빴다. 그러다 마침내 찾아온 두 사람의 이별은 하나마키에게 오랜 시간을 기다린 보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이와이즈미의 집으로 이사하기 전날, 하나마키는 혹시나 이와이즈미가 눈치를 챌까봐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 당장이라면 힘들겠지만 이와이즈미도 사람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상처가 아물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터였다. 언제쯤 그 날이 올까.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이 되고 싶어서, 이번만큼은 어이없이 이와이즈미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나마키는 그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선택했다. 한 때 오이카와가 차지했던 손 뻗으면 닿는 친구의 자리. 하나마키는 급한 마음을 치졸할 정도의 치밀한 계산으로 누덕누덕 기웠다. 죄책감조차 달콤하게 느껴지는 영악한 마음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즐거웠다.

  그러나 슬픔은 내 집이었다. 이제 하나마키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보답 받지 못할 마음이라면 차라리 바랄 것도 없이 너를 미워하고 싶은데 돌아오는 슬픔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일 년 남짓 쌓아온 추억에 묻은 너는 날이 갈수록 반짝였다. 사랑을 잃어 생기 잃은 모습조차도. 내가 너를 살려줄 수 있을 줄 알았지. 시든 꽃에 물을 주고 햇빛을 쬐어줄 수 있는 사람이길 나이길 바랐는데.


  상자 두 박스를 시동을 걸어둔 차에 먼저 옮기고 남은 짐은 여행용 가방과 스포츠 백뿐이었다. 마지막. 현관에서 나가기 전에 괜히 그 자리에 앉아 잘 묶인 운동화 끈을 풀었다. 이대로 차를 몰고 나가면 분명 너는 인사도 하지 않고 먼저 갔다고 화를 내며 전화할 게 분명했다. 그러면 나는 미안하다고, 있지도 않은 일을  급했다고 둘러대며 변명하겠지. 이렇게 뻔한 마음을 넌 왜 알지 못하는지.

  천천히 풀어버린 끈을 다시 묶는 동안에도 끝내 너는 오지 않았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새어나오는 눈물을 훔치는 동안에도 이기적인 마음이 영화처럼 네가 현관문을 열고 나와 마주치길 바랐다. 네가 내 마음을 들추어주었으면 했다. 이것 봐, 이와이즈미. 나도 사실 너를 정말 좋아하는데.

  너는 끝내 오지 않았다. 1년 만에 찾아온 너의 봄을 만끽하는데 내가 들어갈 틈은 없었다. 내 시간은 10년 전 그대로 겨울도 봄도 아닌 너라는 아픈 계절에 멈춰있는데. 제 철을 맞지 못한 꽃은 피어나지도, 그렇다고 영영 시들어 떨어지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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