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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07 [마츠이와] 나의 가장 찬란한


나의 가장 찬란한

마츠카와 잇세이x이와이즈미 하지메



  장소는 배구 코트였다. 봄고 예선이 한참이던 미야기 현의 어느 체육관. 마츠카와는 관객석 가장 위에 앉아 익숙한 민트색 유니폼을 입은 고교 선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들이, 체육관 바닥에 배구화가 끼릭대는 소리가 반가웠다. 배구 경기를 보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나이스 서브! 10번 온다! 꿈이구나. 낯 익은 유니폼과 목소리, 그리고 얼굴들로부터 그렇게 결론지었다. 관객석에 앉아있는데, 저 코트 위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블로킹을 뛰었던 현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상대편은 까만색 바탕에 주황색 줄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한가운데서 열심히 토스를 올리는 세터에게 눈이 갔다. 검은 유니폼의, 검은 옷을 입은 너의 중학교 후배는 진한 향내에 울고 있었다.


  -솔직히 분했어.


  옆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낯이 익어 하마터면 고개가 저절로 돌아갈 뻔했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충동을 억눌렀다. 그 순간 우당탕, 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코트 위의 오이카와가 벤치 쪽으로 넘어졌다. 마지막까지 브로드 토스를 올리면서. 그리고 그 공의 끝은 틀림 없이 너의 손에 닿았다.


  -서브도 오이카와만큼은 결정력이 없고, 오이카와 녀석이 마지막까지 보내준 브로드 공격도 결정짓지 못하고. 그래서 이 시합이 끝나면 나도 서브를 훨씬 쓸만한 걸로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지. 스파이크의 파워도 물론.

  "……."


  담담히 회상하며 너는 웃음을 흘리는 네게 나는 답할 수 없었다. 침묵에도 아랑곳 않고 너는 말을 이었다. 지금 보니 오이카와 녀석, 다칠 뻔 했잖아? 평소라면 화를 냈겠지만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건 이미 벌어진지 몇 년이나 지난 과거니까, 너는 화내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입이 먼저 열렸다. 입과 혀가 먼저 움직이고, 목소리는 나중이었다. 내 목소리인데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린 듯 했다.


  "오이카와가 많이 울었어."


  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너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확실히 네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마키가 다른 후배들 챙겼고, 쿄타니가 네 여동생 돌봐주더라. 카라스노의 히나타는 우는 거 보니까 여전히 꼬마라는 느낌이 들었고, 카게야마도 와서 울 줄 알더라."


  준비했던 말이 아니었는데. 맥락에 상관없이 멋대로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최근 봤던 사람들의 이름과 행동이 어지럽게 머릿 속에 흩어졌다. 아직도 시합에서는 랠리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너 좋다고 따라다니던, 이름이 뭐였더라, 과 후배 여자애도 왔고. 우시지마도 귀국했더라."

  -야.

  "오이카와가 우시지마 보고 한 마디도 안 한 건 그 날이 처음이었을 걸."

  -야, 마츠카와. 인마.

  

  랠리가 계속 되었다. 누가 공에 손을 댔고 토스를 올리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시야만큼이나 흐릿한 기억에 의존해 그랬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네가 강하게 내 말문을 막았고 나는 그제야 속절없이 떨어지는 다른 이들의 근황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너는?


  나는. 

  나는,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필사적으로 다른 이들의 소식을 전한 이유기도 했다. 약간의 틈을 주면 상대의 블로킹을 강하게 뚫어버리는 스파이크를 내려꽂는 고교생 에이스. 그건 내게도 통하는 에이스의 자질이었다.


  -이쪽이야.


  천천히 고개가 네게로 돌아갔다. 목을 돌리는 뼈와 근육은 전부 내 것인데 네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머리 하나 작은 시선의 위치에 네 시선이 있었다. 아오바죠사이의 파란 배구부 유니폼을 입은 너는 고등학생 때의 모습이었다. 내가 가장 처음으로 사랑했던.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교시절 너의 웃음은 꽤 드물었다. 후배들에게나, 동료에게나, 그리고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부주장 에이스. 오이카와가 손 쓰기 어려워했던 쿄타니마저도 존경하게 하는 너는 가장 강하고 거친 선배였다. 오이카와가 늘 깐죽거리는 통에 험상궂은 이미지는 세 배쯤 늘었지만, 누구도 너를 어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게 네가 가진 첫번째 매력이었으니까.


  -다른 놈들 얘기 듣자고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너는 꽤나 상냥한 선배였다. 표현이 거칠 뿐이었다. 스트레칭이나 오버워크에 대해 잔소리를 하는 건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요령 피우는 부원에게 으름장을 놓는 것은 팀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눈물 흘릴 미래를 위해서. 너는 모르는 것 같으면서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나를 보러 왔다고 말하는 너의 입매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는."


  그 전화를 받은 후로 잠을 잘 수 없었어. 잠이라도 자면 현실이 꿈일 거 같아 눈이라도 감고 싶었는데 숨통이 막혀 죽어버릴까봐 눈을 감을 수 없었어. 빈 방과 빈 침대를 볼 수가 없어서 집에 들어갈 수 없었고, 술병에도 술이 없었어. 그런 주제에 이사도 갈 수 없었고, 네가 마지막으로 머문 식장에서 떠날 수 없었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고 싶다는게 정말이었다. 그 날, 그 비 오는 날 횡단보도에 네가 아니라 내가 서있었다면. 그 간단한 식료품을 사오는 일에 네가 아니라 내가 갔다면. 아니, 최소한 같이 다녀오기면 했다면 생겼을 1초의 오차가 지금 너를 이렇게 미소짓게 하지 않았을 텐데.


  -왜 울고 그러냐. 평생 안 울던 놈이.


  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울고 있는 건가. 네가 말하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뻔했다. 눈을 깜빡이니 네가 말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우습게도 내가 기억하는 한, 마지막으로 눈물을 보였던 장소가 지금 이 곳이었다. 카라스노에게 패배의 고배를 마셨던 이 시간, 이 장소. 네가 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다가오는 광경이 꿈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선명했다.


  -마음 안 좋게.


  뺨에 닿는 네 손의 따뜻함은 순전히 내 기억에 의존한 것이겠지만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었다. 나는 감히 네 손에 내 손을 올릴 자신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손 대면 산산히 흩어질 것 같았다. 그 비 오던 날에 아무 예고 없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너는 내 걱정을 읽은 듯 다른 손을 뻗어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네 장례식을 보내는 동안 나는 울지 않았다. 자지도, 먹지도, 울지도 않았다. 이따금씩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에게 목소리를 내는 것정도 였다. 맛층, 그러다가 죽어. 한참 울고나서 눈이 퉁퉁 부은 오이카와가 자신에게 건넨 말이었다. 사고가 난지 나흘 째의 자정이었다. 미친놈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둘 다 감정이 격해져 있었으니 오이카와의 언어 선택을 마냥 타박할 순 없었다. 가장 감정에 잠길 순간에 가장 인간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매 순간 허파에 물이 가득 차올라 숨을 쉬기는 커녕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네가 내 가슴을 끌어 안은 지금, 그 물이 속으로 삼킨 울음임을 깨달았다. 


  "네가 보고 싶어."

  -나도.

  "이와이즈미."

  -미안해.

  "네가 미안할게 아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네 어깨에 얼굴을 묻고 팔을 올려 너를 안았다. 고교생 에이스의 어깨는 숨을 틀어막는 울음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내가 사랑했던. 

  유니폼을 입고 공을 향해 날아오르던 그 순간의 우리는 찬란했다. 아니, 너는 너무나도 빛이 났다. 그게 굳이 배구가 아니라 축구든, 농구든, 아니면 전혀 다른 길이었든지간에 너는 분명 내 눈앞에서 가장 찬란한 사람일 거라고 감히 얘기할 수 있었다. 배구가 있어 네가 있는 게 아니라, 네가 있기에 배구를 한 것이니까. 그리고 넌 아직도 그렇게 빛이 나고 있었다. 내 눈 앞에서, 채 토해내지 못한 서러움을 다 받아내며.

  우리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서로에게 집착하지 않는 척하는 기싸움도 했고, 좋아하지 않는 척, 질투하지 않는 척 온갖 가장은 다하고 의미없는 줄다리기 끈을 잡고 빙빙 돌았다. 나이가 들어 대학생이 되고 짧지 않은 시간을 넘어 동거까지 이룩하고 나선 꽤 뿌듯함도 느꼈더랬다. 이제야 출발점에 섰구나, 하는 생각에. 하지만 운명은 시작점에 선 너를 억지로 잡아끌어 돌진하는 차 앞으로 밀어버렸다. 시작과 동시에 끝나버렸다. 그게 그렇게 억울할 수 없었다. 이제 겨우 시작이라 생각했는데 너는 온데간데 없었다. 우리가 넘어온 시간이 어땠느냐고 물어보려고 돌아보니 오감을 틀어막힌 너는 어둠으로 사라졌다. 미안하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할 건 나인데.

  후회없이 사랑하라고 하던가. 있을 때 잘하라던가. 그런 말들은 왜 지나고 나서야 뼈져리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인생의 진리라 여겨지는 문구들을 가슴에 새기면 새길 수록 누군가의 인생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너의 운명을, 혹은 나의 과거를.


  -사랑해.


  시합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내 의식을 빌린 네 고백이 뚜렷했다. 지금 쯤이면 2번을 달고 있을 나도, 4번을 달고 있을 너도 울고 있을 테지.


  "나도 사랑해."


  코가 시큰거렸다. 편히 잠들지 못했던 눈이 제 기능을 하느라 따가웠지만 억지로 눈을 뜨고 네 얼굴을 담았다. 너도 울고 있어?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우리의 마지막 언어는 그런 멍청한 물음으로 낭비할 수 없었다. 괜찮아.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다. 입술의 감촉이 첫키스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었다. 그러나 똑같진 않았다. 너는, 너니까. 기억의 거울로 반영할 수 있는 그림자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니까.

  눈을 뜨니 아이보리빛 천장이 반겨주었다. 벗지 않은 검은 정장이 무거움과 침대의 푹신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조화를 이루었다. 한계였던 모양이지. 언제 잠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와 술을 마신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인가. 느리게 이어지는 생각의 연쇄가 어느 순간 끊어졌다. 꿈이었구나. 천천히 손을 들어 입술에 가져가댔다. 따뜻하다. 다음으로 느리게 입을 열어 본능적인 행동을 찾았다. 숨을 쉴 수 있었다.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눈매를 타고 옆으로 흘렀다. 숨이, 쉬어졌다.

  너는 끝까지 내게 찬란한 사람이었다.





이와쨩 여동생 얘기는 그냥 누나나 여동생 있는 남매였으면 좋겠다 싶어서 일단 내 마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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