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이와] 꽃이 진다고 그대를
꽃이 진다고 그대를
마츠카와 잇세이 x 이와이즈미 하지메
추천 브금 ::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vocal by 한수연) - 그네
https://youtu.be/Rtfh-G1Mzk4
겨울에도 꽃이 필 수 있을까.
지는 꽃잎 속에 던져진 물음이었다. 물론 지금은 겨울 따위가 아니었고 이미 만개했던 벚꽃조차 잔바람에도 쉬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와이즈미는 나지막이 흘러나온 목소리의 주인공, 정확히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삼 개월 전부터 따로 살던 마츠카와가 늦봄에야 찾아와 뜬금없는 벚꽃놀이를 가자고 제안 했을 때부터 이 부질없는 물음을 알아챘어야 했다. 이와이즈미는 아무런 외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현관에 서서 신발도 벗지 않는 마츠카와에게 지금 바쁘다는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오랜만의 데이트 혹은 산책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법 했는데, 막연한 예감은 불길한 쪽으로 치달았다. 잔잔한 연못가에 던져진 모난 돌이 천천히 파문을 키웠다.
“되겠냐.”
이와이즈미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괜히 사람들이 봄철에 핀 벚꽃을 바라보며 겨울의 추위를 잊는 게 아니었다. 겨울이 있는 곳에 만개란 있을 수 없었고, 꽃이 있는 곳에 동장군은 있을 수 없었기에.
마츠카와의 왼팔은 그의 왼손에, 그리고 왼쪽 손가락들에 이어져 있었다. 왼쪽 검지와 중지에 겨우 걸쳐있는 이와이즈미의 오른손가락과 오른손, 그리고 오른팔만큼의 거리에 늦봄의 허전함이 감돌았다. 그 거리감에 이와이즈미는 몇 년 전을 떠올렸다. 당장 눈앞에 있는 마츠카와보다, 아오바죠사이의 유니폼을 입고 어깨를 나란히 해 하굣길을 걷던 수년 전의 마츠카와가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이와이즈미가 어설프게 붙잡고 있던 마츠카와의 손에서 등으로 시선을 들었다. 어깨 위 텅 빈 허공에는 마츠카와의 자상한 옆얼굴 대신 죽어가는 분홍만 나풀대고 있었다.
“우리 그만 하자.”
간신히 매달려있던 이와이즈미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미끄러져 서로를 잃어버린 손가락들이 더는 세상에 미련 없다는 듯 손바닥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이와이즈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는데, 마츠카와는 세상에 마지막 난 길을 찾은 사람처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눈처럼 꽃이 내린다고 생각했다. 입김도 나오는 것 같았다. 어설프게 보낸 봄의 끝. 그것이 이와이즈미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 * *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마츠카와와 자신의 사이가 언제든 끝날 거라는 걸 여러 징조를 통해 짐작하고 있었다. 오이카와에게 눈치가 없다고 꾸준히 놀림 받아왔고 그 부분을 스스로도 인정한 이와이즈미가 알 정도면 제법 노골적인 힌트들이었다. 다만 누구나 그렇듯, 정확한 시기만 몰랐을 뿐.
감정이나 자잘한 행동의 변화는 제쳐두고서라도 가장 큰 기점은 마츠카와가 직장을 핑계로 동거하던 집에서 이사를 한 일이었다. 처음 살던 곳에서 먼 곳에 직장이 배정 됐을 땐 오히려 걱정하던 이와이즈미를 안심시키던 마츠카와였는데. 어느 날엔가 술에 취한 채 저녁 늦게 돌아와 회사 근처로 이사를 하는 게 나을 거 같다는 말을 꺼낸 마츠카와를 이와이즈미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네가 힘들다는데.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는 이와이즈미를 확인한 마츠카와는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침대위로 쓰러졌다. 마츠카와가 까무룩 잠든 후에도 이와이즈미는 오래도록 그의 옆자리에 눕지 못했다. 배려 없이 침대를 대각선으로 차지한 마츠카와 때문에 비좁기도 했지만, 이젠 그 옆자리에 누울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피부에 닿을 듯이 깨달았기 때문에.
다음 날 잠에서 깬 마츠카와는 아침 식탁에서 이직할 곳을 구하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변명했다. 그 말이 과연 사실일지, 아니면 두 사람의 어색한 아침을 무마하기 위한 사탕발림인지에 대해 이와이즈미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술에 취한 마츠카와를 상대 했을 때처럼 그래, 하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래. 그러면 마츠카와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수저를 내려두었다.
그날 저녁부터 짐을 챙기던 마츠카와는 꼭 사흘 후의 아침에 떠난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마지막 출근 배웅을 해준 이와이즈미는 현관 앞에 기대 앉아 오랜 시간을 혼자 보냈다.
그 길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은 알고 있었다. 주말마다 찾아오던 발걸음이 여러 이유로 뜸해지다가, 아주 가끔씩 술에 잔뜩 취한 마츠카와를 현관에서 안아줄 때도 이와이즈미는 항상 이별의 말을 대비하고 있었다. 마츠카와가 고하지 않았다면 이와이즈미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을지도 몰랐다. 차츰 깎여나가는 시간의 껍질이 다 벗겨지는 그 어느 날이 왔다면.
눈물은 나지 않았다. 처음 이별을 예감했던 날처럼 이별이 찾아온 날에도 눈물이 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홀로 돌아온 집 안에서 청승맞은 울음으로 남은 물건을 정리할 필요가 없었고, 세 달 동안 지워진 마츠카와의 흔적을 대충 둘러보며 오히려 안심했다. 비록 이와이즈미가 텔레비전에서 지겹게 보던 이별의 전형과는 전혀 달랐지만 이것도 이별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이별이라면.
쌓인 라인 메시지나 사진을 지우는 건 비교적 힘들었지만 감수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마츠카와의 핸드폰 번호를 지울까, 말까를 수십 번 고민하다가 그냥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평생 마주치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저와 마츠카와는 너무 오랜 추억을 뿌리부터 공유하고 있었다. 연인의 추억보다, 같은 학교를 졸업해 친한 친구들 사이에 끼어있다는 점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시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고작 연애 사정으로 동창들의 사이를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마츠카와 잇세이와 연인이 되기 이전의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 * *
하나마키는 구체적인 연락 후 이틀 만에 짐을 싸서 들어왔다. 빠른 행동력에 혀를 내두르는 이와이즈미도 친구와의 동거가 내심 반가웠다. 그는 혼자 지내는 걸 선호하는 게 아녔다. 혼자 지내는 데 의도치 않게 익숙해졌을 뿐.
앞으로 그가 쓸 방에 하나마키를 안내해준 뒤 문가에 서서 짐을 내려놓는 오랜 친구를 보는 광경은 기묘했다.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1년까지 갈 수 있는 동거인이 아는 얼굴인 건 확실히 이득이었지만, 몇 개월 전까지 이 방을 쓰던 사람이 애인이었다는 데서 어딘가 달랐다. 마츠카와가 처음 이 방에 자신의 짐을 내려 놨을 때 그는 굳이 내 방 네 방 나눌 필요 없지 않느냐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마츠카와가 꼬박꼬박 자신의 방에 찾아 들어가게 된 건.
하나마키는 홈메이트로 나쁘지 않은 친구였다. 비록 미야기 현에서 가족들과 살다가 나온 늦된 독립이었지만 서툰 집안일이나 할 일 따위는 선배격인 이와이즈미가 지시해주면 곧잘 따라왔다. 하나마키는 ‘그 이와이즈미’가 집안일에 능숙한 점이 재미있는 눈치였다. 옆에 앉아 구경하며 농으로 이죽거리다가 빨지도 않은 속옷을 얼굴로 받은 뒤에야 빨랫감 나누는 걸 도운 건 덤이었고.
“건배!”
크게 외치며 하나마키의 입주를 자축하는 술잔을 나눈 건 일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이와이즈미는 새 프로 팀, 하나마키는 일자리. 각각의 계약이 결정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기도 했다. 가볍게 따라진 맥주 거품이 입가에 묻는 순간이 참 좋았다. 좋은 일들이 겹치면 겹경사라고 하던가. 둘 다 걸음마 단계긴 했지만 고등학교의 끝을 함께한 마당에 시작을 축하하는 건 또 신선했다.
“근데 넌 가업 물려받는 게 편하지 않냐?”
“나도 그 생각 이번에 얼마나 했는데.”
하나마키가 킥킥 웃으며 배부른 한탄부터 쏟아냈다. 엄지로 맥주 거품을 슥 닦아낸 이와이즈미가 발로 하나마키를 밀었지만 하나마키는 순순히 밀려나지 않고 과장된 행동으로 이와이즈미에게 대항했다. 그래서 그 면접 보는 대머리 아저씨가……. 새로 맡은 팀의 최근 경기 결과가……. 그 중에 키 큰 녀석이 있는데……. 그러고 보니 오이카와가……. 오래된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해묵은 일들과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하나마키와 이와이즈미도 아니나 다를까 오이카와부터 유다, 야하바, 킨다이치, 쿠니미, 이리하타 감독님과 같은 오래된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이름들에서 한참 펼쳐보지 않은 앨범 냄새가 났다.
알딸딸하게 술기운이 오르는 와중에도 이와이즈미는 끝끝내 마츠카와의 이름을 꺼내지 않는 하나마키의 배려를 알 수 있었다. 쓸데없이 사람은 좋아서. 술기운에 멋대로 지껄인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어서 아차 싶었지만, 하나마키는 듣질 못한 건지 가장 최근에 만났다던 야하바의 근황을 늘어놓고 있었다. 치킨 두 마리도 성인 남자 둘 앞에서 뼈만 남았고 두 사람은 그것도 모자라 언제 사둔 건지도 모를 마른 오징어를 꺼내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마른 오징어는 마츠카와가 맥주와 함께 즐겨 먹던 안주였다. 그때 사둔 게 아직도 남은 건가. 추억의 꼬리에 엉뚱한 추억이 살아났다. 여러 안줏거리들을 사두어도 마츠카와는 꼭 오징어를 고집했다. 이와이즈미야 술 앞에 모든 안주들이 평등하다는 주의였지만 딱히 음식에 까탈을 부리지 않는 마츠카와가 유독 마른 오징어만 고집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여러 가지 종류로 차있던 안주용 선반은 점점 가공 오징어 포장지의 비중이 늘어갔고, 오징어를 직접 사와서 가스 불에 굽다가 다리를 새카맣게 태워 마츠카와가 배를 잡고 웃은 적도 있었다. 그 웃음이 전에 없이 얄미워 억지로 입안에 탄 오징어 다리를 밀어 넣으려는 이와이즈미와 먹지 않으려는 마츠카와의 씨름 후에 오갔던 입맞춤이 쌉싸름한 오징어 맛이었다는 것까지 떠오르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와이즈미?”
“어? 어, 미안.”
“자꾸 다른 생각 하면 이 형님이 섭섭하다? 아무튼, 오이카와가 전화 좀 하래.”
어엉. 제대로 들은 거냐 그거!? 네가 오이카와한테 연락을 제일 안 한다며? 고등학생 때 둘 째 가라면 서러울 파트너였던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가 가장 연락을 안 하고 지낸다는 사실에 하나마키가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들고 있던 술을 홀짝였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 뿐 아니라 모든 사적인 연락을 거의 끊고 지내다시피 지냈다. 하나마키도 하나마키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고 집에 들어오기까지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져서 이어진 인연이었다. 오이카와나 다른 친구들이 그것으로도 서운하다고 한다면, 안타깝게도 이와이즈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새 일의 자리가 잡히면 그때 연락할까, 오이카와도 미국에 적응하느라 바쁘겠지 등의 핑계로 막연하게 차일피일 미루던 계획이 눈앞에 들이밀어지니 할 말이 없었다. 미루면 미룰수록 친구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렵기도 했고.
사람을 대하는 게 두렵다는 상황은 이와이즈미 인생에 참 희귀한 경험이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굳건하게 정면 돌파를 선호하는 이와이즈미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을 대하기가 어려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룬다는 건 스스로 돌아봐도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게 결국 문제였지만.
생각해보면 하나마키가 빈 집에 같이 지내면 안 되겠냐고 제안할 때까지 남자 혼자 살기엔 너무 큰 집에 버티고 있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이사 해야지. 떠나야지. 새 집을 알아봐야지. 생각이야 백 번, 천 번도 더 했지만 부동산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서길 반복 한 것 또한 수백 번이었다. 마지막으로 돌아선 날은 불현 듯 서러워져 집에 돌아오는 길을 빙 돌아 걸어 돌아오기도 했다. 늦게 돌아가면 누군가 집에 있기라도 할까봐. 그러다 다시 느낀 상실감의 한 구석엔 빙 둘러 돌아온 길만큼의 흠집이 났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냐?”
“뭐 어떠냐. 다 마셔서 치우지.”
아까부터 떠드는 쪽은 하나마키였고 마시는 쪽은 이와이즈미였던 탓에 예의상이라도 말리는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퍽 걱정스러웠다. 이미 볼이 발개진 이와이즈미는 슬슬 이성이 그어둔 경계를 넘는 듯 보여 말려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손이 고집스러워 하나마키는 결국 술병을 뺏어 들어 자신이 대신 채워주는 걸로 고민을 마무리 했다. 이와이즈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자식이 여기 있었으면.”
하나마키가 걱정한 건 이거였다. 한 잔, 두 잔, 세 잔. 술이 더 들어가자 이와이즈미가 드물게 먼저 입을 열었고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하나마키는 누구 이야기를 하는 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순간, 하나마키는 자신이 이와이즈미보다 주량이 세다는 사실을 원망했다.
“좀 더 시끄러웠을까.”
이와이즈미의 눈에 하나마키와 자신의 사이에서 안주를 집어 먹는 오이카와가, 제 옆에 앉아서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들고 있는 마츠카와가 그려졌다. 기억에 의존한 마츠카와가 이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운 것은 너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친구의 친구로 너를 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전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세계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이별이라고 생각했던 그간의 시간들이 와르르 술잔에 쏟아져 목구멍을 태웠다.
“이와이즈미?”
늦봄에서 초겨울로 홀로 걸어오는 동안 많은 일을 채워 넣었다. 일부러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정작 헤어진 연인과 관련 될 만한 일은 전부 텅 비어있었다. 억지로 비워놓은 공백에 채울 답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 덮어놓은 일상이 사소한 계기 하나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하나마키의 부름이 귓전에서 웅웅 울렸다. 두세 번 정도 더 부르는 거 같아서 시끄럽다고 하려는데 입이 무어라고 말을 뱉었다. 누군가를 부른 것도 같았다. 그리고 거기서 이와이즈미의 기억이 끊겼다.
* * *
“미국은 어떠냐?”
-당연히 오이카와 씨의 완벽함으로 승부하고 있지!
“아직은 살아 있나 보네.”
-아직!? 그런 악담하면 오이카와 씨 상처 받아요 이와 쨩!
남이사. 냉정하게 대꾸하는 이와이즈미의 입매엔 어쩐지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랜만에 직접 듣는 친구의 근황도, 그가 여전하다는 사실도 좋은 기분으로 다가왔다. 국가대표는 물론이고 미국 프로팀에서도 우수한 세터로 활약하는 오이카와의 삶은 배구 계에서도 모범이 되는 사례로 손꼽히고 있어서 괜히 이와이즈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친구의 일이 자신의 공로는 아니었지만, 내가 저 녀석이랑 고등학교 때까지 파트너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정도는 되었으니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이와이즈미는 괜히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오이카와가 그리웠다. 물론 입이 비뚤어져도 오이카와에게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는 일은 없겠지만.
“하나마키한테 얼마나 징징댄 거야?”
어쨌든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하나마키 때문이었다. 예의 술자리가 아니라도 같이 지내는 동안 하나마키는 계속해서 오이카와에게 연락 한번 넣으라는 말을 밥 먹듯이 했다. 이와이즈미가 양심에 찔려하는 걸 알기 때문에 감히 그럴 수 있었고,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건 이와이즈미였다. 항복 선언 치곤 노이로제에 걸리겠다며 소리를 빽 지르긴 했지만.
-이와 쨩이 너무한 거잖아?
“어차피 너도 바쁘고.”
장난스러운 투를 거두진 않았지만 한결 낮아진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이와이즈미가 퉁명스러운 변명으로 방어했다. 일본은 눈이 내리는 한낮이니 오이카와가 있는 미국은 새벽이거나 잘 잡아도 한밤중일 터였다. 전화할 타이밍을 잡는 동안, 이와이즈미는 소꿉친구와의 거리감을 묘하게 실감했다. 하나마키는 출근해서 낮 시간에는 집이 거의 비어 있으니, 이와이즈미만 괜찮다면 자긴 아무 때나 통화해도 괜찮다고 한 건 오이카와였다.
-이와 쨩이 나 바쁜 걸 걱정해주다니. 정말 어른이 다 됐구나~.
“기술이 발전하는데 왜 수화기 너머에 있는 놈을 팰 순 없는 거냐.”
진심을 담은 말에 오이카와가 왁자하게 웃었다. 너 새벽 시간에 그렇게 웃어도 되냐? 옆집은 새벽에 더 시끄러운 걸~. 조금 칭얼거리는 말에 이와이즈미가 편히 웃었다.
-맛키랑은 잘 지내?
“네가 더 잘 알지 않냐? 뭐, 그럭저럭.”
며칠 전까지 추위가 심해 보일러가 얼어 고생한 이야기를 꺼내자 오이카와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맛키랑, 이와 쨩이랑 지내고 싶다. 그럼 우리 고등학생 때처럼 재미있을 텐데.
“어.”
한 명이 빠진 오이카와의 가정도, 필요 이상으로 무뚝뚝해진 이와이즈미의 대답도 부자연스러웠다.
-이와 쨩.
“왜.”
-오이카와 씨가 이와 쨩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라. 소름 돋는다.”
-진심이야.
싫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와 통화를 하는 건 좋은데.
-울지 마, 이와 쨩.
예전부터 남의 심중을 잘도 꿰뚫는 친구였다. 그걸 지구 반대편에서 해낼 줄이야. 언제부터 울고 있던 건지 이와이즈미 스스로도 가늠하지 못했다. 오이카와가 울지 말라고 했을 때부터? 오이카와가 이와 쨩이라고 불렀을 때부터? 통화를 시작했을 때부터? 아니. 하나마키와의 술자리에서 필름이 끊겼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꽃 지는 날 네 뒷모습을 보던 날부터.
뭘 기대라도 한 거냐. 어이가 없어서 우는 와중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쉬지 않고 줄줄 흐르는 눈물이 꼴사나웠다. 오이카와는 옆에서 위로해주지 못하는 처지가 싫다고 말했지만, 이와이즈미는 이 눈물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수화기를 끊지 않는 참을성을 보여주는 오이카와에게 고맙다고도 생각했고.
괜찮은 척 같은 자리에서 아집을 부렸다. 손톱만큼의 변화도 허락하지 않았으면서 전부 다 괜찮은 것처럼 침묵으로 억지를 썼다. 이별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닌데. 한 주먹을 꽉 채우고도 흘러넘치는 햇수를 쉽게 보아선 안 되는 거였는데. 너는 그렇게 갔더라도 나까지 그러면 안 됐는데. 차라리 그 때 솔직하게 아파했더라면 상처가 곪아 지금 터지는 일도 없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전부 늦어버렸다. 나는 왜 마지막까지 늦는 걸까. 너와 나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그 꽃들마저 때가 늦어 흩어지는 것들이었지.
일부러 막아두었던 수도꼭지의 마개가 풀리니 흘러 넘치는 건 후회였다. 차라리 아파할 걸. 비참하더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매달려볼 걸. 이사하지 말라고 할 걸. 아침에 말 한 마디 더 건넬 걸. 따뜻한 말 한마디, 눈길 하나를 더 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몰랐는데.
늦은 후회가 방울방울 흩어졌다. 몇 달이나 둑으로 막아둔 늦은 이별은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미뤄둔 시간은 지독하게도, 둘이서 한 사랑의 이별을 혼자 하게 만들었다.
꽃이 진 자리에 눈이 내렸다. 꽃과 함께 할 수 없었던 동장군이 울며, 울며 아프게 조화를 피웠다.
* * *
시간은 무심했다. 하나마키가 부쩍 말라가는 이와이즈미를 걱정하는 동안 온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자신이 미련하게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이후 이와이즈미는 급속하게 생기를 잃었다. 미국에서 오이카와가 어렵게 짬을 내어 며칠 다녀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이상 행동을 보이거나 일상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항상 나사 하나가 풀려 있었고 먹는 양이 부쩍 줄어든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나마키가 세수할 때 쓰는 폼클렌징을 치약으로 착각해 이를 닦는가 하면, 핸드폰도 들지 않고 어딘가 홀연히 외출을 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일도 잦았다. 다 큰 성인 남성을 이런 일로 걱정하는 게 하나마키는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이러다가 큰일이라도 날까 걱정하는 입장에선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와이즈미의 코치직 계약이 프로팀의 스캔들로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이 상태로 일을 맡는 게 어려우니 차라리 잘 됐다고 말했지만, 하나마키나 오이카와는 차라리 일이라도 빨리 하는 게 나을 거 같다며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꽃샘추위가 찾아들었다. 쇼파에 앉아 멍하니 밖을 보던 이와이즈미는 창문을 툭툭 치는 나뭇가지에 어느덧 목련이 돋아난 것을 발견하고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추워!”
“아, 엄살 부리지마.”
부엌에서 쌀을 씻던 하나마키가 빽 소리치자 이와이즈미가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하얗고 탐스런 목련 하나가 열린 창문 안으로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하얀 꽃잎을 건드리는 순간 바람이 확 불어왔고, 베란다 안으로 하얀 꽃잎과 파란 잎들이 우수수 밀려들어왔다. 맨발에 밀려오는 것들이 꼭 파란 바다 같다고 생각했다.
“나갔다 온다.”
“저녁 먹기 전엔 와~. 오늘은 맛키 씨 특제 카레라이스니까.”
“엉.”
조금 두툼한 자켓을 입고 신발을 꿰어 신은 뒤 밖에 나오고 나서야 베란다 문을 닫지 않은 걸 떠올렸지만 하나마키가 어련히 알아서 하려니 싶었다. 겨우내 두툼했던 차림에 비해 옷가지가 날씬해지니 어쩐지 발걸음도 가벼웠다. 언제나 그렇듯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지만 오늘의 손님이었던 목련 나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느린 걸음으로 뒤쪽으로 돌아갔다. 이와이즈미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작았지만 뒤쪽으로 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원길이 바로 연결 되어 있어 봄철이면 전경이 좋았다. 목련 나무가 멀리서 내려다보는 조금 떨어진 공원길은, 벚꽃이 내리는 그 길이었다.
하얀 목련 잎은 아직도 파르르 내리고 있었지만 아직도 나무에 핀 목련송이들은 잔뜩 남아있었다. 아파트 바로 앞에 목련 나무는 얼핏 보아 네다섯 그루였지만,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집 창문을 간질이던 녀석의 앞에 서서 올려다보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떨어지는 꽃잎과 매달려 있는 송이가 잘 구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눈 오는 거 같네.”
이와이즈미의 감상도 같았다. 말로 뱉지 않았을 뿐이지. 속절없이 봄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이와이즈미가 천천히 몸을 돌려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마츠카와의 차림새는 봄보다는 가을에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이와이즈미는 갈색 트렌치 코트의 색이 과하게 어두운 게 넌센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봄이니까. 하얀 목련 꽃이 내리는.
침묵과 시선이 이어졌다. 오직 꽃눈만이 시간이 멈춘 기적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이와이즈미가 겨우, 한 걸음을 앞으로 뗐다. 그냥 지나가는 길일 수도 있었고, 자신이 아닌 하나마키 때문에 왔을 수도 있었다. 대담한 한 걸음이었다. 그날, 그렇게 이별 한 이후 마츠카와가 어떻게 지냈을 지도 모르는데. 마츠카와는 모든 걸 깨끗이 잊고 친구로서 찾아온 걸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자신이 다가가는 동안 당황하지 않는 마츠카와를 보았다. 작년 봄보다 더 깊어진 눈매를 보았고, 원래도 없던 살이 더 빠져 볼품없이 움푹 파인 볼을 보았다. 긴장을 꽉 쥐었던 주먹에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끌어당길 것처럼 펴지는 손을,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그 입매를.
그리고 알았다. 너 역시 꽃이 진다고 나를 잊은 적이 없음을.
제법 떨어져 있던 거리를 이와이즈미가 처음에는 천천히, 나중에는 빠르게 좁혔고 어린애처럼 달려드는 그를 마츠카와가 강하게 품에 감싸 안았다. 너무 많은 생각이 엉켜서 되려 한 마디도 입 밖으로 튀어 나오지 않았다. 미안해. 어렵사리 말을 꺼낸 마츠카와의 등을 이와이즈미가 붙들었다. 등 뒤로 이른 봄을 알리는 꽃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겨울이 있으니까 꽃이 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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