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넨] 시간루프물
BGM :: Birdy - Shelter
https://youtu.be/QXwPUYU8rTI
I still want to drown whenever you leave 여전히 난 네가 떠날 때면 물 속에 잠기고 싶어져
Please teach me gently on how to breathe 부디 상냥히 알려줘,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 지
루시퍼 x 메히넨(메히나ts)
임시 막사는 텅 비어있었다. 이 시간엔 늘 이 곳에 있었는데.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 어떤 시간에 어느 장소에 있는 지 누구도 정확히 추측할 수 없었지만, 메히넨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물고 막사 커튼을 닫았다. 수십 번 반복된 시간에서 루시가 이 시간에 막사 안에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또 무언가 바뀌었다는 것을.
기억하기로, 자신이 세는 '횟수'가 열 손가락을 넘어갈 때까지 메히넨에게 변화란 좋은 것이
었다. 변화란 희망을 뜻했고 희망이 곧 밝은 미래로 이끌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을 꼭 열 번 반복하고 나니 그대로 손가락 열 개가 전부 잘린 듯했다. 손이 있어도 손을 쓸 수가 없었고 열한 번째 딛고 선 땅바닥에 꺼져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다섯 쌍의 손가락을 여러 번 잘라낸 것은, 오직 그 땅에 저와 그가 함께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한 구석으로부터 부서져가는 것은 메히넨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일주일도 되지 않는 시간을 홀로 일년 가까이 되풀이해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머리론 알고 있어도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익숙한 바람이 불어와 눈가를 간지럽혔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루시를 찾은 건 의외로 가까운 장소였다. 얼기설기 세워둔 나무 울타리가 쳐진 절벽 끝자락이었다. 앞서 느꼈던 불안함이 무색할 정도로 멀쩡하게 서있는 루시의 모습이 보이자, 잔뜩 긴장했던 어깨에 힘이 조금 빠졌다. 익숙한 달빛이 등을 돌리고 선 루시의 어깨에 잔상처럼 달라붙어 흩어졌다. 제것보다 조금 어두운 은발인데도 달빛과는 훨씬 잘 어울렸다. 매일같이 본다면 보는, 지겨울만한 모습인데도 괜시리 목이 메이고 눈이 시렸다.
"거기서 뭐해? 감기 걸려."
태연하게 건네는 말 한 마디가 신중했다. 말 한 마디, 숨 소리 하나에 눈 앞의 루시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선 그게 정상인데도 메히넨에겐 오히려 비정상이었다. 소위 배드 엔딩이라 불리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같은 시간을 수십번 반복한 그였기에. 차라리 루시가 감기에 걸린다면 했다. 아주 심한 감기라면 내일 전장에 나가는 일을 방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루시의 상관이자 기사단의 간부인 메히넨마저 그런 치졸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참으로 소중한 은빛.
"잠깐의 달구경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여태까지 밤마다 작전이니 사전 조사니, 바빴으니까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루시가 고개를 돌려 메히넨을 보았다. 메히넨이 그에게로 조금 더 다가갔다. 십 분 전만해도 작전이니 뭐니 같은 막사 안에서 얼굴을 마주 보았음에도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했다. 막 깊어지려는 밤하늘을 닮은 눈이었다. 겨우 루시의 눈에서 시선을 뗀 메히넨이 올려다본 것 또한 그런 밤하늘이었다.
"보름달이야 매달 뜨는 건데 새삼스럽기는."
"그 말도 맞지만, 괜히 소원을 이뤄준다는 말이 있는게 아니니까요."
"소원이라도 빌었어?"
짐짓 이죽거리며 메히넨이 루시의 바로 앞에 멈추었다. 나란히 설까도 싶었지만 딱 한 걸음을 사이에 둔 그 자리에 마음이 동했다. 그 정도의 위치가 지금의 그들에게 어울린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을까. 아무리 애를 써도 루시의 소매를 붙잡아 같은 시간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서, 일부러 그보다 조금 뒤쳐진 시간에 머무르는 까닭에.
"예. 빌었습니다."
루시가 천천히 돌아서서 메히넨을 마주 보았다. 메히넨에게 닿는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 그것이 달빛인지 밤하늘빛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뻗어나가는 손을 참은 메히넨이 루시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었다. 물으려고 했다. 질문이 미처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훌쩍 다가온 루시의 입술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먼저 손을 뻗어 메히넨을 잡은 것은 루시였다.
달큰한 입맞춤에 온갖 걱정이 녹아내렸다. 수 없이 같은 시간을 반복하면서 메히넨은 자연스럽게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행동에 온 감각을 곤두세웠다. 자신이 말 한 마디를 바꾸면 다른 이들의 행동은 두 가지가 바뀌었다. 그들이 바뀐 행동 두 가지에 또 여럿의 반응이 변화했고 메히넨은 그렇게 운명이 방향을 틀 거라 생각했다. 가장 신뢰하는 부하이자 사랑하는 연인이 죽지 않는 결말이.
눈 앞에서 생을 잃어가는 루시를 보며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바랐다. 그랬더니 정말로 시간이 거꾸로 돌았다. 살아 있는 루시가 자신의 앞으로 걸어왔을 때만큼 여신의 은총에 감사한 적이 없었다. 이후 메히넨이 무슨 짓을 하든, 루시가 같고 다른 죽음을 반복할 때마다 그녀의 자비는 계속되었지만 거듭되는 은총이 정말 축복인가에 대한 의문이 물에 뜬 기름처럼 떠올랐다. 외면할 순 있었지만 떨쳐낼 수도 없었던 의문이 표면을 전부 덮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당신이 더이상 헤매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길고도 짧은 입맞춤 또한 그녀가 내린 작은 은총일까. 아니. 이건 여신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따뜻하게 덥힌 입술을 떨어트린 루시가 천천히 삼켰던 질문에 대답했고, 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도 전에 메히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성급한 눈물을 서두르지 않고 닦아주는 루시의 손길이 안타까운 시선만큼 쓰리고, 따스했다.
"이제 됐어요. 메히넨."
"뭐가."
"절 위해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언제부터 눈치챘을까.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보기 드문 눈물을 쏟아내는 메히넨을 보곤 루시가 그의 이마에 가만히 입술을 떨어트렸다. 기시감이 들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며칠 전 눈을 떴을 때부터, 과연 몇 번째의 며칠 전이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자꾸만 시간을 반복하는 메히넨에게 얽혀있기 때문이었는 진 몰라도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고, 어제 있었던 일이 정말 그 날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매번 죽음에서 눈을 뜨는 경험은 물론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꿈자리가 사나운 줄 알았다. 하지만 새로운 아침을 시작할 때마다 마주하는 메히넨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하면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더이상 이 세계에 속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우습게도 그는 메히넨의 작은 감정을 즉각 눈치챌 위인이 아님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막아둔 감정이 터진 댐처럼 와르르 쏟아져 눈물로 타고 흘렀다. 나는, 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떠는 메히넨을 루시가 다시 한 번 상냥히 감쌌다. 저는. 입술 사이를 가르고 나온 말로도 물기 어린 그의 단어를 끌어안았다.
"저는 정말로, 여태 당신과 지낸 것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당신은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 요령도, 의지도 없던 어린 아이를 딱 한 번 돌봐주었더랬죠. 저는 그것으로 살아갈 힘을 받았습니다. 이젠 그걸 돌려드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언어가 천천히 귓가를 맴돌았다. 우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제 어깨는 축축해져만 가서, 루시가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럽고 안타까운 눈물이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 눈물을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혼자 차곡차곡 쌓아왔을까. 감히 짐작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자신은 그 눈물이 고인채 썩지 않게 해줄 수는 있어도 다른 것으로 대신 해줄 수 없었으니까.
"살리고 싶었어."
"알아요."
저가 그와 같은 상황이라도 당연히 그랬을 터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혼자 남는 결말 따위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을 거였다. 다만, 떠나야만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길이 갈리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의 루시는 메히넨이 그의 시간을 반복할 수록 얼마나 망가지고 있는지 훤히 볼 수 있었다.
메히넨이 고개를 들었다. 늘 좋아했던 붉은 눈이 해질녘 바다에 빠지는 해처럼 젖어있었다. 아마 반은 보름달 탓일 터였다. 참으로 강하고 멋지며,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던 나의 붉은 사람. 불타는 해는 져버리고 마지막 소망을 담은 보름달이 떴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었다.
"사랑해."
단 세 글자의 언어에 무슨 마법이 걸려있어 들을 때마다 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걸까. 처음 고백을 했을 때, 이후로 어색해서 한참 말을 아끼다 겨우 말했을 때, 살을 섞으며 격정에 못이겼을 때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 생각이 나 뜬금 없이 툭 던졌을 때. 그리고 지금. 같은 두 사람과 같은 감정에서 태어나는 세 글자가 그때그때 각기 다른 숨을 갖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마법이었다. 가슴이 아프도록 생생한 기적.
두 사람이 마주보는 얼굴을 가까이 해 가볍게 이마를 맞대었다. 사랑해. 알아요. 사랑해. 사랑합니다. 울음으로 정리되지 않은 숨 사이로 일분일초도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 고백이 엉켰다. 누가 한 말이고, 누가 받을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루시가 그런 것처럼 메히넨도 그들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있었다. 두 번 다시 과거로 역행해 살아 숨쉬는 그를 마주할 일이 없을 거였다. 다시 한 번 서러움이 북받쳤다.
인생에 마지막으로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바람은 찼고, 소원을 담은 달이 이루어줄 준비를 마치고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절벽 끝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