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무] 요시와라 라멘토 1~4
요시와라 라멘토 1~4
시리무
배경은 일단 영국이고 블랙 가문은 귀족 가문이야. 왕실과도 혈연이 있어서 대공의 지위를 갖고 있고 여러 사람들이 정치, 경제에 강한 영향력을 뻗고 있고 현재 가주인 오리온 블랙은 대공작. 큰 회사 네임드를 걸고 여러가지 부문에 힘을 쏟고 있어. 그 중엔 매춘도 관련이 있지. 블랙 가에서 관리하고 있는 매춘 관련 업소는 딱 한군데인데, 그냥 보기에는 일본풍 술집이야. 이곳의 이름은 요시와라. 힘 깨나 쓰는 가문이 소유하고 있으니 단속이라던가 문제 삼을 일도 잘 안 생기고, 고위층끼리 은밀하게 만날 장소도 자주 마련하는 곳이지. 여자들은 영국인이 대다수지만 일본풍이라 동양인도 좀 있고 그래.
리무스 루핀은 고아 였는데 이 요시와라의 점장..? 이라고 해야하나 하여튼 관리하는 사람이 나시사 블랙의 어머니(드루엘라 블랙)였는데 그녀랑 그녀의 어린 딸 나시사가 밤길을 걸어왔을 때 눈에 띄었어.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애가 삐쩍 말라서 가로등 밑의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옷도 너덜너덜하고 딱 보기에 버려진 아이였어. 드루엘라는 리무스를 흘러가는 시선으로만 슥 보고 나시사의 손을 잡고 가버리려고 했는데 나시사가 쉽사리 리무스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했어. 그러다 리무스랑 나시사의 시선이 마주쳤는데 리무스가 먼저 고개를 푹 숙였어. 사실 꽤 겁도 나고 나시사의 시선이 감당하기 힘들었을거야. 그런데 늘 얌전하던 나시사가 어머니의 손을 놓고 쪼르르 달려가 리무스의 앞에 섰어. 드루엘라도 리무스도 놀랐지. 예쁜 아가씨 옷이 먼저 보인 리무스가 경계하듯 나시사를 올려다봤어. 둘의 시선이 두번째로 마주치고 나시사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어. 어머니! 이 애 눈이 정말 예뻐요. 달 같다. 리무스 7살, 나시사 8살의 일이었지.
드루엘라는 나시사가 잘 부리지 않는 고집 때문에 리무스를 데려 왔어. 얼마 데리고 있지 않다가 다시 내보낼 생각이었는데, 어째선지 나시사가 유달리 리무스에게 친절하게 굴고 신경쓰는 면을 보여서 매몰차게 거리로 내보내진 않았어. 그렇다고 집에 계속 두자니 아들을 새로 들였다는 둥 이상한 소문이 돌까 신경쓰였고. 그래서 드루엘라는 나시사에게 우리 집에 무상으로 있는게 불편하다고 리무스가 그랬다하며 나시사의 납득을 받아낸 뒤, 나시사가 보고 싶다고 하면 리무스를 그때그때 데려올 수 있게 해주겠다는 조건으로 다른 곳에 보내겠다고 했어. 드루엘라는 리무스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요시와라로 보냈어. 여자들 시중을 들고 잡일을 하게 키울 생각이었지. 처음 리무스랑 떨어지고 나서 나시사는 주말엔 꼬박꼬박 리무스를 보길 원했고 처음 몇주간은 그렇게 했지. 그러나 나시사도 자라면서 여러 일을 겪게 되고 리무스는 거의 까맣게 잊어갔어.
드루엘라 로시에스(블랙)는 시그너스 블랙과 결혼해서 슬하에 삼녀를 두었어. 나시사는 그중 막내인데 장녀 벨라트릭스는 얌전하고 문제 없이 지내길 원하는 부모와 성격적으로 마찰이 심해서 거의 없는 취급에 뭘 하고 다녀도 신경 쓰지 않는 처지가 됐고 급기야는 스무살이 됐을때 집을 나가서 집안에서는 그녀의 얘기가 오가지 않는게 암묵적인 룰이었어. 차녀 안드로메다는 자라면서 권위주의적인 가문에 반발해서 스물 한살의 나이에 결혼하고 출가 외인이 됐고... 이중에 그나마 나시사가 부모가 가장 아끼는 딸이었어. 얌전하고 예쁜 아가씨로 자랐거든. 나시사는 스무살 성인이 되고나서 말포이 집안의 아들과 약혼을 했는데, 드루엘라가 요시와라를 나시사의 명의로 넘겨주려고 했지만 말포이 집안의 반대로 요시와라는 오리온 블랙의 차남 레귤러스 블랙의 소유로 넘어갔어.
리무스의 입장으로 넘어가자면 어렸을 때 양친을 잃었고 친척 집에 들어가게 됐는데 얼마가지 못해서 버려졌어. 그 이후로 어린 리무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어. 친척집에 잠깐 있었을 때 뭐라 입만 열면 미움 받고 맞기 일쑤였거든. 나시사의 관심 덕에 블랙 가에 잠시 있었을 땐 어른들이 묻는 말에도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나시사가 호의적으로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정도. 굉장히 말라있었는데 나시사의 집에 잠시 머물렀을 땐 꽤 든든하게 먹을 수 있었고 리무스는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어. 그동안 겨우 보기 좋은 정도가 됐는데, 적응을 하겠다 싶었을 때 요시와라로 가게 됐어. 하도 여기저기 옮겨다니다보니 사는 곳을 옮기는 것 자체에 거부감은 없었지만 요시와라는 집도 아니고 환경도 다르다보니 리무스도 당황했지. 당시 실질적인 소유주는 드루엘라 블랙이었지만 이곳에서 지내면서 모든 일을 관리하는 사람은 앨리스 프레웨크라는 여자였어. 리무스를 퍽 상냥하게 맞아준 그녀는 먼저 리무스를 직접(..) 씻겨주었어. 꽤 당황했지만 도와주는 다른 여자들과 앨리스한테 이기지 못하고 얌전히 뽀득뽀득 닦아졌(..)지. 앨리스는 리무스를 그렇게 맞이하는 동안 이런저런 간단한 얘기들을 조곤조곤한 말투로 해줬어. 이곳은 술을 사고 파는 곳이고 손님들이 많이 오니까 말썽부리면 안된다고. 널 그냥 맡은 건 아니고 너도 이곳에서 시키는 일을 해야한다고. 이상한 사람도 싫은 사람도 많겠지만 티내지말고 요령있게 지내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어린아이에게 하기는 조금 어려운 말도 있었지만 앨리스는 귀에 잘 박히는 어조로 말해주었지. 사실 그녀는 남자아이인 리무스를 여자 아이들을 처음 맞을 때처럼 똑같이 맞아주고 있었지만 손님들 앞에 내놓게 키울 생각은 없었어. 그냥 시중을 들고 힘쓰는 일을 하게 할 생각이었지. 이런저런 얘기를 아무말 없이 듣던 리무스는 새 옷을 입을 때 앨리스한테 처음으로 말을 했어. 술은 싫어요. 앨리스가 웃으면서 대꾸해줬지, 너는 아직 어리니까 마실 필요가 없단다.
7살의 리무스는 그렇게 요시와라에서의 생활을 시작했어. 얼마동안은 앨리스와 방을 함께 쓰고 그녀를 따라다니면서 요시와라의 일이 어떤건지 알게 됐지. 음식을 만드는 부엌에도 가보고, 부엌에서 음식이나 술을 어떻게 날라다가 손님이 있는 방으로 옮기는지를 자주 봤고 꼭 1년이 지난 후엔 리무스도 간단한 술상이나 음식상 정도는 날라 손님방에 내주는 일도 하게 됐고, 뒷정리는 거의 항상 도왔어. 문 너머로 남자들의 허세 가득한 웃음과 여자들의 교태 넘치는 웃음 소리를 들으며 리무스는 어린 나이에도 요시와라가 단순한 술과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니란 걸 알았지. 또 요시와라의 일하는 여자들이 리무스를 정말 귀여워했어. 매일 바보같고 허세만 심한 남자들보단 우리 리무스가 훨씬 귀엽고 예쁘다느니. 요시와라에 딸린 정원 뒤쪽으로 데려가서 맛있는 디저트 같은 것도 건네주고 다들 좋은 여자들이라 친동생처럼 챙겨주곤 했지. 리무스가 특별히 밥을 적게 먹거나 하는 편은 아닌데 밥보다는 가끔 이렇게 챙겨주는 초콜릿을 정말 좋아했어. 애 입맛이라 그러려니 했던 리무스의 단 것을 좋아하는 습관은 커서도 별로 바뀌지가 않았지. 거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리무스에게 요시와라의 여자들이 주는 초콜릿은 기분 좋고 애정어린 관심의 표현이었으니까. 어쨌든 요시와라의 현실에 대해 앨리스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해주지 않고도 알게 할 생각이었다면 아주 성공적인 교육이었어. 여자들은 리무스가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고 앞에 두고는 푸념을 늘어놓곤 했으니까. 영리하고 눈치빠른 리무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듣기만 하면서도 어떤 얘기인지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있었지. 자기를 자주 찾아주던 손님이 이제 오지 않는다거나. 사실 도망갈 약속을 했다거나. 같이 일하는 누구가 너무 교태스러워서 꼴보기 싫다던가.. 노골적이고 털털한 여자들은 성적인 표현도 노골적으로 쓰기도 했고..
리무스가 자라는 동안 요시와라의 변화는 몇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벨라트릭스 블랙의 출현이었어. 집을 나왔다고 선언한 그녀는 요시와라에서 일하겠다며 막무가내로 뿌득뿌득 우겼어. 그리고 드루엘라 블랙에게 알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앨리스에게 했지. 개점하기 몇시간 전의 시점이라 손님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 어찌나 소란스러웠던지 온 직원들이 나와서 두 여자의 기싸움을 구경할 정도였으니 굉장한 소란이었지. 한참 서로를 노려보며 가네마네 하던 와중에, 앨리스 프레웨크도 만만치 않은 여자라 벨라트릭스에게 두 가지 조건을 걸었어. 첫째, 벨라트릭스 블랙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말 것. 둘째, 가게의 영업에 방해가 된다면 그 즉시 가게의 소유주에게 알릴 것임. 벨라트릭스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조건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벨라트릭스 블랙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 점을 환영했어. 가게 안에서 그녀는 '벨라'가 되었고 오만하고 건방진 성격도 다행히 모난 구석이라기보다 손님들에게 어필하는 수단이 되었지. 비록 다른 여자들과 원만하게 지내기는 어려웠지만, 다들 앵간하면 벨라트릭스를 피하게 됐어. 벨라트릭스가 공동생활을 한지 얼마 안되서 싸운 돌로레스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거든. 돌로레스가 이제 어떡할거냐고 바락바락 소리질러도 벨라트릭스는 모르쇠로 일관했어. 앨리스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고.. 얼굴이나 몸으로 먹고 사는 직업인데 괜히 상처 입으면 입은 쪽이 손해니까. 어쨌든 손님 얼굴에만 상처를 안 내면 됐고, 몇몇 손님들은 벨라의 성격이 앙칼지고 개성적이라 마음에 든다며 자주 부르는 단골도 있었고.
벨라트릭스는 리무스를 처음 봤을 때 동생 나시사가 애완견처럼 데려온 애라는걸 한눈에 알아봤어. 어머, 너 그 때 나시사가 데려온 강아지잖아? 깔깔 소리 높인 웃음은 옵션. 리무스는 대꾸없이 물끄러미 벨라트릭스를 쳐다봤어. 리무스는 벨라트릭스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언뜻 들은 이름이나 나시사를 언급한 말에서 대강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지. 리무스는 빨래를 하고 있었고 덕분에 굳이 입을 하지 않아도 더 힘주어서 빨랫감을 짜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는데 리무스의 손 위로 뭔가 툭 떨어졌어. 벨라트릭스가 자기 속옷을 빨라고 그 위로 던진거야. 리무스는 얼굴이 발개졌고 벨라트릭스는 그걸 보고 또 웃음이 터졌어. ...여기서 자기 속옷은 자기가 빠는 거에요. 리무스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벨라트릭스의 속옷을 잡아 그녀의 발치에 던지듯 놓았어. 이후로도 벨라트릭스는 가끔 리무스를 괴롭히다시피 놀렸고, 리무스도 그녀와 엮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무시하려 애썼지. 나이를 정리하자면 리무스 16세, 벨라트릭스 20세. 안드로메다가 19세, 나시사가 17세였어.
이제 빨리 감기를 해서 리무스가 19세. 요시와라 안에서 이럭저럭 좋은 생활 수준으로 자란 리무스는 비교적 건강하게 자랐지. 차분하고 눈치빠른 영민함으로 처신도 잘하고, 자라면서 같이 일하는 여자들의 말동무도 잘 해줘서 인기가 꽤 많았어. 일하는 여자들은 많이 바뀌었지만 나이대가 있어서 다들 남동생처럼 예뻐해주는건 여전했고. 여자들이 많은 분위기에서 자란 탓인지 전형적인 남성형으로 자란게 아니라 작고 유약한 분위기였지. 여기서 이점을 볼 수 있는게 아마 우락부락하게 자랐다면 손님상을 내가는 일을 못했을거야. 자그마한 남자애가 조용히 술상을 두고 가는게 보기도 좋으니까 말이야.
사건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게 터졌지. 펜리 그레이백은 요시와라의 오래된 단골이었어. 블랙 가가 운영하는 유통업계를 관리하는 사람이라고만 리무스는 알고 있었지. 얼굴도 오며가며 자주 봤지만 부드러운 인상이라곤 할 수 없는 얼굴이었어. 덩치도 크고, 무뚝뚝한 표정에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거칠어 보였거든. 그와 밤을 보낸 여자들도 무드는 쥐뿔이라곤 없고 그냥 힘만 좋은 거친 남자라는 평이 대부분이었고.. 말솜씨도 없고 과묵한 편이라 같이 술자리를 해도 재미가 없다고 했어. 그날도 펜리의 술상에 함께 나가는 여자들이 불만을 토로했지. 건방지다 할 수도 있었지만 이곳 여자들은 나름대로 고급이라는 자부심도 조금 있었거든.
손님들이 많은 시간대면 리무스도 덩달아 바빴어. 부엌일을 돕다가 술상이나 음식상을 날라다 옮기고, 부엌과 긴 복도를 몇번이나 오가니 꽤나 힘든 일이었지. 들어오는 손님들이 줄어들고 나가는 손님들이 더 많아질 때쯤, 리무스가 자기가 치우기로 정해진 방의 손님이 나가기를 기다리며 방문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쉬고 있었어. 고단했던지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눈을 떴지. 손님이 가시는구나, 입고 있던 유카타를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완전히 사람이 빠지길 기다리는데 문을 연 손님이 한참을 지나도 문지방을 넘질 않아. 멍하니 맞은편 벽만을 보고 있던 리무스가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옆을 봤는데, 그 방의 손님이었던 펜리 그래이백과 시선이 딱 마주쳐버린거야. 예상치 못한 일이라 멍하니 시선을 마주 하고 있다가 화들짝 시선을 먼저 뗀 리무스를 본 펜리가 입을 열었어. 너. 리무스가 처음 들어본 펜리의 쉰 목소리였지. 술을 제법 마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뒤이어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흘렀어. 술을 마신 상대가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리무스에게 있어서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거든. 저, 저요? 리무스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던 제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했어.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펜리의 목소리에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지. 그래, 너. 오늘은 너가 낫겠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펜리가 리무스의 팔을 잡아끌어 안쪽 방으로 데려갔어.
요시와라의 내부 구조는 긴 통로가 안과 밖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밖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술을 마시는 많은 방들이 있고, 통로를 따라 더 안쪽으로 빠지면 좌우로 갈라진 길이 있어. 오른쪽으로 빠지면 일하는 여자들의 숙소나 부엌으로 가는 별채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본채에 그대로 연결되지만 쉽게 말해 여자들이 몸을 팔수 있는 침구들이 놓인 방들이 있는 쪽이었어. 펜리는 자연스럽게 통로 왼쪽의 문을 열었고 리무스는 그 문지방을 넘지 않도록 힘으로 버티려 했지. 청소나 빨랫감을 찾거나 침구를 미리 깔아 놓기 위해 낮에는 자주 들어간 공간이었지만, 영업 시간에 리무스가 그 곳을 들어간 일은 결단코 한 번도 없었어. 들어갈 일이 없었으니까. 리무스는 좋지 않은 예감에 문틀을 잡았지만 펜리의 힘을 이길 순 없었어. 자기가 어느 방으로 끌려가는지도 경황이 없었고 잠깐만요!라는 외침은 다 내뱉지도 못하고 펜리의 손바닥에 도로 삼켜질 뿐이었어. 그 순간 이미 방에 들어와서 신음하고 있는 남녀의 정사 소리가 귀에 꽂혔어. 아, 나는 오늘 여기서 아무 일 없이 나가기는 힘들겠구나.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리무스는 이미 깔려진 침구위에 내동댕이쳐지다시피 구겨졌어. 아이러니하게도 그 침구는 오늘 낮에 리무스가 미리 모든 방에 깔아놓은 침구 중에 하나였지.
얼결에 처음하게 된 관계는 고통뿐이었어. 리무스는 펜리가 자신의 유카타를 벗기고 다리를 강제로 벌리는 동안에도 앨리스나 다른 누군가가 뭔가 잘못 됐다는 걸 알고 와주지 않을까 문밖의 인기척에 집중했어. 분명 펜리가 있던 술자리에 다른 여자들도 있었을텐데 정말 아무도 이 상황을 모르고 있는 걸까. 온갖 생각을 하는 머릿속은 사실상 패닉이었어. 거칠고 투박한 펜리의 손이 리무스를 파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급하게 밀려들어오는 펜리를 감지하는 리무스의 몸이 비명을 질렀고, 그를 받아들인 하반신에서부터 허리, 배, 가슴, 목까지 숨이 턱턱 막히며 리무스는 되려 변변찮은 소리도 내지 못했어. 그냥 죽을만큼 아플뿐이었지 같이 지내던 여자들이 말하는 쾌감이라던가 테크닉이라던가 힘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지. 안그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시야가 급기야 뿌옇게 흐려지고 나서야 리무스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머리로 상황을 인지하기엔 몸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그저 빨리 이 상황이 끝나길, 혹은 꿈이길 바랄 뿐이었어. 신경이 마비되는 기분이라 눈물이 흘러도 닦을 생각도 못했고 펜리는 더더욱 그걸 신경쓰며 닦아줄 다정한 손님이 아니었고. 그저 펜리가 흔들면 흔드는대로, 벌리면 벌리는 대로 받아들이며 밀리지 않도록 엉망이 된 침구만 애꿎게 손으로 움켜쥘 뿐이었어. 고통과 상처와 패닉만 남긴채로 리무스의 첫밤은 그렇게 흘러갔고, 저도 모르는 새에 리무스는 까무룩 기절해버렸지.
눈을 떴을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꿈이길 바라는 거였어. 하지만 미친듯이 화끈거리는 아랫도리와 허리, 그리고 몸 전체를 관통하는 통증이 말이야 통증이지 정말 혼이 빠질 것 같았어. 몸을 일으키는 것도 힘겨웠지. 방에는 리무스 외엔 아무도 없었고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새벽녘이었어. 이제야 자신은 잘 모르던 남자한테 강간을 당했다는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졌지.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왔고 리무스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소리 없이 울었어. 요시와라에서 일하는 이상 이것을 강간이라고 주장하기엔 자신은 아무 힘이 없었고, 오히려 이것이 제 일의 일환이라 하면 뭐라 대들 말도 떠오르지 않았어. 여자들한테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 자신한테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간과한걸까. 그걸 간과한게 잘못인가. 너무 편하게 지낸 것에 대한 벌인가. 누군가 도와주길 바랐지만 리무스는 또 깨달아 버린거야, 이 상황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달래줄 사람은 없다는 걸. 이미 그건 양친이 돌아가셨을 때 잃어버린 보호막이었어. 누가 자신을 도와줄까, 앨리스? 다른 여자들? 벨라트릭스? 그녀들은 이 일에서 자신을 지켜줄 명분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는 사람들이라는걸 깨달은거지. 리무스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척에게 버려지고 저를 쉽게 잊어버린, 잠시나마 몸을 의탁했던 나시사의 집을 떠올렸어. 잠시나마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준 곳이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더욱 상처로 남은 곳. 쫓겨나듯 등 떠밀려 나온 곳들을 생각하니 몇시간 전과는 다른 의미로 패닉에 빠질 것 같았어. 이곳에서 또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었어. 어느새 울음이 멈추고 말라 붙은 눈물 자국을 문지르던 리무스가 안간힘을 써서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어. 한걸음 한걸음이 위태로웠지만 적막한, 혹은 아직도 새벽까지 불사르고 있는 소리를 무시하고 숙소의 제 방으로 돌아갔어.
리무스는 작은 독방을 혼자 사용하고 있었는데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힘들어서 방에 돌아온 후에도 뜬 눈으로 남은 새벽을 지새웠어. 리무스가 방에 돌아온 시간은 새벽 4시쯤이었고 8시쯤엔가 누군가 리무스의 방문을 연거야. 피곤하지만 무의식중에 경계하는 눈으로 침입자를 살펴본 리무스는 그게 앨리스라는 것을 깨달았어. 앨리스는 조용히 리무스의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어. 앨리스가 입을 열지 않아서 리무스는 초조하게 앉은채로 앨리스의 얼굴만 쳐다보았어. 영업에 방해가 된다고 쫓겨날까봐 겁이 난 리무스가 성급하게 먼저 입을 열었어. 열심히 할게요. 앨리스가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표정을 일그러트렸어. 사실 앨리스는 리무스를 어렸을 때부터 보면서 부모 같은 마음을 가졌을 거야. 심정이라면 다른 일이 더 생기지 않게 막아주고 싶지만 여기서 계속 지내는 동안, 그리고 이미 '첫손님'을 받아버린 후로 소문이 나지 않는다는 걸 장담할 수 없었어. 앨리스는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참고 그러고 있으면 곧 배가 아프지 않냐고. 남자의 것을 받아낸거라면 빼내야 한다고 얘기해주고 힘들면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어. 아니에요, 저 혼자 할게요. 리무스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어. 앨리스가 한참 리무스를 보다가 알았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먼저 나갔어. 리무스도 그녀가 나간뒤 금방 욕실로 들어가 어쩔 수 없이 제 손으로 뒤를 열어 남아있는 정액을 빼냈어. 힘들고 고통스러운건 물론이고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지. 하지만 역시,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할 순 없었어. 가슴에 사무치는 고독함을 느끼며 정액을 어느정도 제거했다고 생각한 리무스는 더러운 걸 씻어내고 싶은 충동에 이어 샤워를 했지만, 그런다고 저가 펜리와 잤던 사실까지 하수구에 흘러보낼수가 없었지. 요 몇년간 울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리무스는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샤워기의 물을 맞으며 또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리무스가 요시와라에서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기분탓인지 리무스는 자신을 보는 손님들의 시선이 평소보다 조금씩 오래 머문다고 생각했어. 펜리는 꼭 예전만큼 요시와라를 찾아 왔지만, 온 횟수의 반 이상은 여자들이 아닌 리무스를 끌고 안쪽 방으로 들어갔어. 두번째, 세번째 펜리와 밤을 보내고 난 뒤엔 리무스는 허탈함과 비참함에 눈물로 밤을 새웠지만, 그 다음 밤 후엔 제 방으로 돌아와 잠을 잤고, 어느샌가 울지 않게 됐지. 익숙해진거야.
펜리와의 첫 관계를 가진 19살의 여름 이후 꼭 반년이 흘렀어. 리무스 19살의 12월, 어느 추운 겨울 날이었지. 연말연시쯤이라 정말 바쁜 와중이었고, 리무스는 요령 좋게도 부엌 난로 앞에 앉아 추운 몸을 잠깐 녹이고 있었어. 그런데 부엌이랑 밖을 왔다갔다하며 여자들이 소란스러웠어.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귀를 쫑긋 세우니 여자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좀 알아 들을 수 있었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거였어, 요시와라에 블랙 형제가 함께 왔다. 요시와라는 블랙 가의 소유긴 하지만 정작 블랙 성을 가진 남자들은 잘 오지 않았어. 그쪽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중역들이 자주 왔지. 그래서 젊은 블랙 형제가 왔다는 소식에 여자들이 관심 갖고 흥분할만 하지. 더군다나 잘생겼다니까. 여자들이 꺅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리무스도 슬그머니 호기심이 생겼지. 저와는 다르게 탄탄대로를 달리는 두 형제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멍하니 생각에 잠긴 리무스를 공상에서 깨운건 동양계 여성인 초 챙이었어. 펜리 그레이백씨가 불렀으니 상을 갖고 가라고 했지.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리무스에게 상을 들려준 그녀에게 리무스는 웃어보이며 부엌을 나섰어. 처음엔 펜리의 이름만 들어도 숨이 턱턱 막혔는데, 이젠 그럭저럭 견딜만 했어. 이렇게 웃을 수 있을 정도니까 말이야. 상을 들고 문 앞에 섰는데 좀 의아했어. 펜리는 주로 혼자 요시와라에 오곤 해서 큰방에 있는 경우가 한번도 없었는데, 오늘 리무스가 간 방은 VIP룸이었거든. 또 안에서 여자들과 펜리의 목소리뿐 아니라 다른 남자들의 목소리도 들렸어. 남자들이 한마디 하면 여자들이 과장되게 꺄르르 웃었어. 어쨌든 상을 들여야하니 문을 열었어. 남자는 넷이었고 여자는 다섯. 리무스가 잘 알고 있는 펜리의 옆에 여자가 둘, 나머지 남자 셋의 옆에는 여자가 각자 한명씩 앉아 있었지. 눈에 띄는 점은 한 남자 옆에 붙어있는게 벨라라는 점이었어. 벨라는 꽤 교태스러운 몸짓으로 장난치듯이 제 옆의 남자에게 붙고 있었는데, 남자는 무뚝뚝하면서도 싫은 눈치였지. 음식을 올리고 나가려는데 펜리의 쉰 목소리가 리무스를 붙잡았어.
너.
네?
여기 있어라.
순간 주변이 어색할만큼 조용해졌어. 펜리가 리무스를 사는 사실은 적어도 요시와라의 여자들이라면 암묵적으로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리무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있기만하자 펜리가 제 양 옆의 여자들을 손짓으로 쫓아냈어. 여자들이 창피해하며 방 밖으로 나가고 나서도 리무스가 뻘쭘하게 서있자 벨라의 옆에 있던 남자가 무심하게 툭 한마디를 건넸어. 앉으라잖아. 그 말에 데인듯 화들짝 놀란 리무스가 결국 펜리 옆에 앉았어. 리무스는 여자들처럼 술자리를 즐겁게 하는 법을 교육 받은 것도 아니라,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앉아있기만 했어. 이따금씩 펜리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는 정도. 그래도 누구 하나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지. 남자 넷의 대화는 -대화의 8할을 차지하는 제임스의 농담을 제외한다면- 사업적인 부분이었어. 리무스는 조용히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가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이 블랙 형제라는 사실을 알았어. 펜리의 사업적인 말에 필요한 말만 하는 남자가 동생인 레귤러스 블랙, 그리고 리무스에게 무심하게 앉으라고 한 쪽이 형인 시리우스 블랙. 나머지 한명은 리무스도 들어본 적 없는 제임스,라는 남자였어. 셋중에서도 시리우스의 외모가 정말 뛰어나게 미남이어서 리무스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봤지. 까만 머리에 은회색 눈동자가 잘 어울려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가만히 앉아서 술을 마시는데도 우아한 분위기를 지울 수가 없었지. 미남이라는 호칭이 정말 딱 어울리는 느낌. 동생인 레귤러스도 시리우스와 굉장히 빼다박은 모습이었지만 미남이라기보다 소년같은 느낌이었고 시리우스보단 아우라가 약해보였지. 제임스는 잘생겼다기보단 호감형인 얼굴이었고. 저런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미남에 집안 배경도 좋고, 여자들도 좋다고 매달리겠지 분명. 부족한게 없는 사람. 리무스는 문득 펜리가 아니라 시리우스 때문에 자신이 더 초라해진다고 느꼈어. 그에게 비하면 자기는 정말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같은 존재란 생각이 들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시리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시리우스의 은회색 눈과 딱 마주친거야. 사나운 눈길에 리무스가 놀라서 먼저 시선을 돌렸고 괜히 술병을 만지다가 펜리의 술잔에 술을 채우는 시늉을 했어. 그 뒤로 리무스는 고개를 되도록 다른 남자들과 시선을 안마주치려 해서, 시리우스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걸 잘 몰랐지.
리무스는 여기저기 다른 사람들 틈에서 흘러흘러 지내오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눈치는 꽤 빨랐어. 말은 제임스가 가장 많았는데 어찌나 붙임성이 좋은지, 펜리 옆에 주눅들어 앉아있는 리무스한테도 이름을 물어보고 말을 붙이는 정도였지. 제임스는 시리우스랑 대화를 자주 이었는데, 서로 멍청이니 바보니 험한말을 해도 사이는 좋아보였어. 레귤러스나 제임스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들은 적당히 맞장구도 치면서 그들이 크게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그냥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자체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는데, 벨라는 달랐지. 리무스는 애초에 벨라가 왜 여기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 그녀도 일단 블랙가에서 가출한 입장이니까 그쪽 집안 사람들하고 마주치면 안되지 않을까 싶었거든. 블랙 형제는 벨라를 알아본 것 같지 않았지만.. 벨라는 제임스나 다른 남자들이 리무스에게 말이라도 걸라 치면 무섭게 표정이 변했고 어떻게든 대화의 흐름을 저에게 끌어오려고 노력했어. 그때마다 적당히 넘어가는 제임스라는 남자의 화술에 리무스는 적지 않게 감탄했지.
시간이 흘러 자정이 다 되갈무렵 술자리가 파하는 분위기였어. 시리우스는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벨라를 매정하다시피 뿌리치며 일어났고 레귤러스와 제임스도 더 볼일이 없다며 일어났어. 다만 펜리는 달랐지. 남자 셋과 여자 셋이 일어났는데도 펜리는 묵묵히 제자리에 앉아있기만 해서 리무스는 일어나야하나 말아야하나 눈치만 보고 있었고. 여섯사람이 나가면 방안에는 펜리와 자신뿐이라 또 덜컥 겁이 났어. 또 그런 밤이 오겠구나. 하지만 리무스는 도망치기보다 이미 체념부터 먼저 하고 있었지. 그때,
여기는 손님이 나가는데 앉아있네. 직원 교육도 안하나.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리무스가 덜컥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어. 가게 영업에 클레임이라도 들어오면 곤란해지니까. 손님이 원하는대로 맞춰주는게 당연한 거였거든. 죄송하다고 일어나서 안녕히 가시라고 꾸벅 인사를 해도 말을 꺼낸 시리우스는 자리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어. 리무스는 고개도 못들어서 시리우스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고 정말 화가 많이 났나보다, 하고 짐작할 정도라 어쩔줄을 몰랐지. 레귤러스와 제임스는 벌써 현관까지 가버린 모양이고 방 안에는 펜리와 리무스, 그리고 시리우스까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애매한 상황이었어. 그때 아무말 없이 술만 홀짝이던 펜리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리무스의 팔을 억세게 쥐었지. 얼마나 아팠는지 리무스가 아픈 소리를 무심코 냈지.
펜리는 시리우스를 한번 쳐다보더니 리무스를 끌고 방밖을 나갔어. 그 행동이 얼마나 억지스러운지 따라가던 리무스가 발이 꼬여서 넘어질 뻔 했지. 시리우스는 펜리와 리무스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들이 안쪽 복도로 들어가 왼쪽 모퉁이를 볼 때까지 집요하게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쫒았어.
12월 31일 밤은 요시와라에서 매년 작은 행사가 있는 날이야. 요시와라를 홍보할 겸, 블랙 가에서 관련 있는 인물들을 초대해서 일본식 술자리에서 새해를 맞곤 했거든. 요시와라의 여자들이 일본 게이샤의 춤을 연습해서 보여주거나, 연주를 하거나, 꼭 일본풍이 아닌 노래나 음악도 적절히 어레인지해서 보여주는.. 뭐 그런류의 행사. 새해를 맞는 날이니만큼 모든 사람들이 초대에 응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매년 유명한 사람들이 자주 왔지. 정치경제계 사람뿐 아니라 연예인이나 이런 사람들도..
리무스는 말일의 행사를 준비하느라 며칠 전부터 정말 눈 돌아가게 바빴지. 주로 부엌일을 돕거나 필요한 물건을 행사용 큰 방으로 옮기거나 하는 일을 도맡아 했는데, 남자 일손이 딸려서 언제나 힘쓰는 일에 차출되곤 했지. 특히 큰 방에 장식품이나 상석을 어떤식으로 놓을지, 어떻게 놓아야 사람들이 불쾌하지 않을 공간을 제공할지 생각해보고 앨리스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하곤 했는데, 앨리스는 그럴때마다 적극적으로 리무스의 의견을 수용해주었어. 이 시기마다 요시와라의 이벤트 진행 및 실내 디자인에 도움을 주는 프랭크 롱바텀이라는 남자가 있는데, 앨리스랑 같이 다니면서 리무스의 의견도 친절하게 잘 들어주었어. 프랭크랑 앨리스가 허락해준 자신의 의견으로 꾸며지는 걸 보며 리무스는 알게모르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뿌듯하고 행복했지.
31일 당일에도 정말 눈코뜰새 없이 바빴지. 여자들한테 옷 갖다주랴, 그 많은 음식이나 술상을 나르랴... 그래도 막상 다 준비해놓고 나서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할 일은 눈에 띄게 줄었어. 앨리스는 같이 행사를 구경해도 좋다고 했지만 리무스는 가지 않았어. 혹시나 펜리가 오면 자신을 부를지도 모르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이긴 진저리 쳐지게 싫었거든. 리무스는 자리를 피해 정원 한 구석 쪽으로 갔어. 정원은 리무스가 좋아하는 장소중 하나였는데, 정원 한가운데에 있기보다 (손님이 갑자기 바람 쐬러 나올 수도 있으니까) 구석 모퉁이를 돌면 크고 넓은 돌 하나가 놓여져 있었고 거기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어. 낮은 담 너머로 호수도 보이고 밤이면 달도 잘 보이는 곳이라 숨겨진 명당이라고 할 수 있었지. 오늘도 그곳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에 뜬 달을 봤지. 남색 유카타 차림이라 제법 추웠지만 미리 챙겨둔 목도리랑 장갑을 주섬주섬 끼니 그래도 견딜만 했어. 다리를 쭉 뻗고 쉬고 있자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원쪽으로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어. 한 사람이 아니었는지 말소리도 들렸지. 누군가 싶어 모퉁이 쪽에 부터 쭈그리고 앉아 빼꼼이 내다보니 블랙 형제인거야. 시리우스 블랙과 레귤러스 블랙. 시리우스는 장례식에나 온것마냥 까만색 정장을 쫙 빼입고 왔는데 누가 나무라지도 못할 정도로 잘 어울렸고, 그보다 키가 조금 작은 동생 레귤러스도 같은 옷이었지만 시리우스만큼의 맵시는 나지 않았지. (물론 레귤러스도 지나가던 여자가 쓰러질 정도로 잘생겼지만 시리우스가 너무 뛰어난게 함정) 둘이서 뭔가 얘기를 하는 것 같더니, 시리우스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어. 레귤러스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과 싫은 소리를 하는게 보였지만 시리우스는 몸만 좀 돌릴 뿐 끝끝내 담배를 피울 생각인 것 같았지. 리무스는 저도 모르게 그 장면을 훔쳐보고 있었어. 시리우스가 어떤식으로 담배룰 물고 불을 붙이는지, 고개를 한번 숙였다가 들고 훅하고 연기를 내뿜는 모습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지. 동경일까? 리무스는 그렇게 생각했어. 뭘해도 그림이 되는 남자. 등장만으로도 삽시간에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고 제 마음과 눈길마저도 잡아채가는 남자. 저도 그렇게 되고 싶은걸까. 곰곰이 고민하는 동안, 리무스는 자신의 뒤에 누군가 나타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
'누군가'가 리무스의 뒤을 확 덮쳤어. 으악! 너무 놀란 리무스가 소리를 질렀고 소리를 들은 블랙 형제의 시선도 리무스가 있는 쪽으로 쏠렸지. 모습을 드러내게 된 리무스가 허둥지둥 하는 사이 시리우스가 담배를 떨어트려 발로 비벼 끄고 한숨을 쉬고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로 한마디 툭 던졌어. 적당히 해 제임스. 그러자 리무스의 등에 업힌 제임스가 낄낄거리며 리무스한테서 떨어졌지. 레귤러스는 한심하단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있을 뿐이었고, 시리우스는 혀를 찼어. 제임스가 넘어지기 직전의 리무스를 잡아 일으켜주고 (즐거워 하는 거 같았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햇지.
리무스가 뭘 열심히 보고 있나 궁금했더니 고작 너희들인거야. 그래서 장난 좀 쳤지.
제임스의 말을 들은 리무스가 당황해서 어버버 했어. 제임스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과 훔쳐보고 있었다는 걸 들켰다는 점에서 가슴이 철렁했거든.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를 했는데 블랙 형제는 별 생각이 없어 보였어. 민망해하던 찰나에 제임스가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리무스의 어깨를 툭툭 쳤지. 사실 블랙 형제나 제임스나 초대 받아서 오긴 왔는데 나름 각자의 사정 때문에 자리를 피한거였어. 제임스가 먼저 리무스한테 악수를 청해서 리무스는 얼떨떨하게 악수를 받았지. 제대로 인사도 안했다면서 자신을 제임스 포터라고 소개했어. 리무스는 이때 제임스의 성을 처음 알았지. 포터라면 어느 업계에서 유명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리무스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 제임스가 시리우스와 레귤러스를 차례로 소개시켜줬어. 레귤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무스랑 간단히 악수를 청했고(여기서 리무스가 놀란건 레귤러스가 생각보다 차갑지 않다는 점), 시리우스는 가볍게 눈인사만 했지. 제임스가 이녀석이 내 절친이라고 어깨에 팔을 둘렀을 때 아 좀, 징그러워. 하면서 쳐내기만 했고. 제임스를 주축으로 넷 사이에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어. 리무스도 처음엔 세사람 사이에 껴있는게 불편했는데 갈수록 편해졌어. 제임스가 걸어오는 몇번의 장난에도 편하게 웃을 수 있었고 뭣보다 블랙 형제도 그를 꺼려하지 않는게 느껴져서 내심 안심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넷은 나이도 다 밝혔지만 제임스의 주도 하에 리무스는 어색하게 말을 놓기 시작했어. 시리우스, 레귤러스, 제임스. 제임스는 성으로 불리지 말고 친근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했고, 블랙 형제는 둘다 블랙이다보니 성으로만 부르기 애매했거든. 처음에 리무스가 큰 블랙, 작은 블랙 소리를 했다가 제임스가 빵 터치고 레귤러스가 작다는 소리에 욱하고 시리우스가 곱게 미간을 구기는 바람에 그냥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지.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제일 먼저 깨달은건 리무스였지. 아니, 시리우스였을지도 몰라. 벽에 기대서 하늘을 보고 있는 그를 따라서 올려다 봤더니 검은 하늘에 하얗게 눈송이 떨어졌거든. 눈이다, 하고 말로 뱉은건 제임스였고 떨어지는 눈송이에 가장 먼저 손을 내민건 레귤러스였지. 각자 내리는 눈을 감상하느라 잠시간 넷 사이에 침묵이 흘렀지만 표정만은 부드러웠지. 리무스가 스무살을 맞는, 1월 1일 0시의 눈 내리는 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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