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종아리를 쥐고 쓸어 올리는 것은 손이었고, 무릎부터 지분거리며 훑어 올라가는 것은 입술이었다. 계절 탄 흔적도 없는 흰 다리에 내심 감탄하며 탐하는 제임스가 마지막으로 머문 자리는 왼쪽 허벅지 바깥쪽이었다. J.P. 본인 이름의 이니셜이 사랑스러워서 못 견뎌 결국 이를 세우고만 제임스를 레귤러스가 발로 툭 치며 타박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웃음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얇은 책으로 코까지 얼굴을 가린 레귤러스가 못이기는 척 다리를 오므리자 잽싸게 옆자리를 꿰차고 앉은 제임스가 레귤러스의 손에서 책을 뺏었다.
“몸에 막대기를 새기고 싶어 할 줄은 몰랐네요.”
퉁명스러운 농담에 픽 웃음을 흘린 제임스가 부러 탁 소리 나게 책을 서랍위에 올렸다. 차분한 레귤러스의 시선이 책과 제임스 사이를 한번 오가는 동안 제임스의 입술이 레귤러스의 입술을 덮었고, 레귤러스가 눈을 감는 동안 제임스의 손이 그의 손을 더듬어 쥐었다. 입술을 열어 엉기는 혀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고 어색하고 부끄러워 머뭇거리기엔 함께한 시간이 길었다. 매번 타액에서 시작해 몸을 섞는 감각도 익숙해지냐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하지만 분명 달라지는 것은 있었다. 분위기를 잡고 반전되는 공기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상대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 그랬다. 제임스의 경우엔 더욱. 원체 가까운 사람에 대해선 관심이 많은 만큼 눈치가 빠른 그였기에 가능했다.
“싫어?”
쪽, 하고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간지러웠다. 제임스가 눈치 챈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켕길 구석이 있는 건 아니라 레귤러스는 여전히 침착했다. 침착하고 싶었다. 이미 젖은 입술을 괜히 적신 레귤러스가 비스듬히 화두를 돌렸다.
“어디다 할 건데요.”
“아직 안 정했는데. 시리우스는 팔에 할 거라더라. 난 잘 보이는데다가 할까? 손가락? 아! 아니면 아예 막대기에 어울리게 내 막대기…….”
너는 했잖아. 모로 누운 제임스가 손가락으로 제 이니셜을 따라 그렸다. 본의 아니게 허벅지를 타인의 명함으로 내준 레귤러스는 묘한 전류를 느꼈지만 피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덜컥 리무스와 멋대로 문신을 했는데, 제임스는 못하게 막는 것이 어불성설이었다. 레귤러스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제임스는 더 이유가 궁금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눈빛이 야생에서 먹잇감을 발견한 사자와 같았다. 레귤러스는 그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임스 포터였다.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가져야 직성이 풀리고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면 이뤄야만 다음으로 마음 편히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세를 돌리는지도 얄미우리만치 터득하고 있는, 그 제임스 포터였다. 몇 해 동안 가까이서 제임스를 지켜본 레귤러스는 목표가 생길 때마다 보이는 집중력을 마주하면 저도 모르게 생각부터 한번 돌려보는 버릇이 생길 정도였다. 순순히 무는 것을 지켜볼 것인가, 한번쯤 말려볼 것인가의 차이 뿐이었지만. 대상이 본인이 되면 또 다른 문제가 되어버리곤 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분명 레귤러스는 제임스가 저가 그런 것처럼 자신의 몸에 R.A.B라는 알파벳 문신을 새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무서우리만치 발달한 짐승의 감-이라고 레귤러스는 부른다.-으로 제임스는 자신이 그렇다는 걸 확신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하면 제임스가 싫어할 거라는 것도, 레귤러스는 알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임스 포터가 레귤러스 블랙, 한 사람에게 매일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제임스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충분히 레귤러스에게 사랑의 증거라고 부를만한 것들을 보여주고 행동해주었다. 약간의 차이와 마찰은 있었지만 어떻게든 이해하게 됐고, 다시 생각해도 피곤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만한 시간을 건너온 만큼 신뢰의 문제는 충분히 흐릿해졌다.
하지만 제임스가 레귤러스를 아는 만큼, 레귤러스도 제임스를 알고 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더 빛나는 사람이었다. 시리우스도, 리무스도, 그 밖의 사람들도 제임스에게 이끌려 모였다. 구김살 없는 성격이나 자기 사람에게는 끝도 없는 오지랖과 유연함은 사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레귤러스 자신도 제임스의 그런 점에 끌렸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레귤러스는 난생 처음 느끼는 이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할지 처음엔 혼란스러웠다. 그가 주변에 사람이 많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게 아니었다. 걱정보단 질투에 가까웠고 질투보단 소유욕에 가까웠다. 깨달은 순간 레귤러스는 덜컥 겁이 났다. 짓궂긴 해도 제임스는 선하고 정의로웠다. 태양에 비유할 만큼 빛나고 활기찬 사람이라, 좁은 속에 틀어박힌 추한 마음을 들키기 싫었다. 들키고 싶지 않아서 되려 관대한척 굴었다. 친구들을 보러 가기보다 조금 더 함께 있어주길 바라도 그냥 두었고 자신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너무 늦게 들어와도 과하게 불평하지 않았다. 적당히 걱정할 수 있는, 그 선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렇게 기대치를 내려놓으면, 오히려 꼬박꼬박 멀어지지 않고 돌아오는 제임스 덕에 그때마다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심장 한 켠으로 딱딱하게 자리 잡은 욕심은 웬일인지 손톱만큼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부풀어 올랐다.
“레귤러스?”
길어진 침묵을 깬 목소리는 걱정이었다. 까만 눈동자를 또르륵, 소리 없이 굴린 레귤러스가 대답 없이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들켰을까. 까만색보다 더 깊고 넓은 밤색의 눈동자가 저를 유심히 쳐다볼 때마다 레귤러스는 마음 졸임과 동시에 충동질하는 가슴을 느꼈다. 차라리 들켰으면. 내가 말을 못하니, 당신이 찾아내주었으면.
“다음에 얘기할까?”
“……네.”
죄책감은 쾌감이었다. 연애에서 말하지 않은 사실을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일인지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문신을 새겨 오니 당신도 하겠다고 한다. 그 반응을 솔직하게 기뻐하는 희열이 있었고 말리는 죄책감이 있었다. 솔직하게 터트리는 것은 추하다고 웅크리며 숨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변함없는 당신 덕분에 어느새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 자꾸 올라오는 것은 다 당신 때문이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니 내가 떨어지는 그 순간에, 제대로 잡아내라고도 하고 싶었다.
“제임스.”
이불을 덮고 누우며 가만히 부르면 조건반사 마냥 몸을 감싸고도는 팔이 있었다. 사랑해요. 아주 작게 말해도 귀신처럼 알아듣는 귀가 있었다. 나도 사랑해. 진심을 담아 똑같이 대답해주는 목소리가, 사람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줄 것 같은 그런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