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세대 글 합작(http://ryuin227.wix.com/marauder )에 참여한 글.
피터팬 / 제레귤
1.
“오늘 기분은 어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따사로웠다. 유리창을 간지럽히고 흰 페인트로 덧칠한 창틀에 내려앉은 빛줄기들은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생생했다. 소리도 잡을 수 있다면 한손으로 잡아서 멀리 치워버릴 텐데. 의례적인 질문은 따뜻하고 기분 좋은 햇살보다는 성가신 파리에 가까웠다. 레귤러스는 창밖에 두고 있는 시선을 꿈쩍 하지 않은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침묵은 기분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의사 전달 방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판에 긁히는 펜 소리가 거슬리게 들렸다. 뒤이어 발소리가 멀어졌다. 억지로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레귤러스는 그제서야 뻐근해진 목과 허리를 돌려 창가와는 정 반대편에 있는 테이블의 달력을 집어 들었다. 빨간색 매직은 언제나처럼 환자용 침대 끝에 끈으로 매달려 있었다. 매직뚜껑을 잡아당겼더니 뽁 하고 울었다. 레귤러스는 5월 22일의 네모 안을 빨간 대각선으로 그어버렸다. 올해의 달력은 1월부터 온통 붉은색이었고, 서랍 안에는 작년 8월부터 꾸준히 그어온 작년의 달력이 죽어있었다. 대각선으로 갈라진 5월 22일을 아예 빨간색으로 뭉개버렸다.
레귤러스는 정확히 작년 8월 16일에 이 병원에서 깨어났다. 말을 할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많은 기억을 잃어버린 채였다. 비상 연락처, 가족의 여부는 물론이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레귤러스라는 본인의 이름은 누군가 써둔 침대 보드에 적힌 걸로 겨우 알았을 뿐이었다. 급한 글씨체였다. 성도 없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어떤 사고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몸에선 어떤 외상이나 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레귤러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인이었지만 무기력하게 침대를 차지한 그를 쫓아내는 사람은 8개월하고 보름동안 단 한명도 없었다. 의무적으로 회진을 도는 의사가 매일 똑같은 질문을 묻는 것 외엔 그를 찾는 사람도 없었다. 잃어버린 아들이라는 어머니도, 우연히 연락이 닿아 친구라고 오는 사람도, 전혀.
멀쩡한 사람도 이런 환경에 놓이면 미쳐버릴지 모를 노릇이었다. 턱밑까지 차오르는 갑갑한 현실에 대항할 기억 한줌이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던 말하는 법도 잊어버릴 것 같아 몇 번이고 창문 밖의 간판을 소리 내 읽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뭔가 단서라도 있을까, 찾아오는 의사나 지나가는 직원들을 붙잡고 수차례 똑같은 질문을 했다. 처음엔 조심스러웠지만 쫓기는 감각에 초조해져 나중엔 아무에게나 질문을 퍼부었다. 내용은 늘 똑같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건가요? 하지만 누구도 모른다며 이상할 정도로 대답을 회피하고 급한 일을 찾아 가버릴 뿐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갈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
병원에서 나가려는 시도도 여러 번. 혹시나 기억나는 풍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멀리, 오래 가지도 못했다. 무의식중에 자리 잡은 불안감을 이기지 못해 번번이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과 병원의 이름을 기억해 돌아오곤 했다. 텅 빈 머릿속에 감옥 같은 병원만 또렷하게 새겨지는 게 서러웠다. 반나절을 헤매기도 하고, 길게는 며칠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환자복에 병원 슬리퍼를 끌고 돌아다니는 레귤러스를 본 행인들은 수군거렸다. 주변을 살펴볼 틈도 없이 금방 자리를 떠야했고, 밤이 되면 질이 나쁜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기도 했다. 경찰에게 쫓기기도 했다. 언제나 원점이었다. 지친 몸과 무기력해진 정신을 이끌고 1인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힘없이 침대를 비운 날들의 공백을 달력에 빨갛게 채웠다.
2.
“오늘 기분은 어때?”
“꿈을 꿨어요.”
레귤러스는 꿈을 자주 꾸었다. 상세한 내용은 매번 달랐지만 답답한 병원이 아닌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큰 줄기는 같았다. 터무니없는 내용이 오히려 더 생생해서, 의사에게 설명하면 진단을 받고 정신병동으로 옮겨갈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레귤러스는 단 한 번도 현실에선 빗자루를 다리 사이에 끼고 망토를 펄럭거리며 날아다니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레귤러스는 빗자루를 타고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사람에 대한 꿈을 꿨다. 까만 망토를 입은 또래들이 모여 있는 고성의 꿈도 많았다. 사람이 아닌 허리까지 겨우 오는 키의 이상한 괴물이 자신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반복되는 몇 가지 꿈 중에서 유일하게 ‘비정상’과 관련이 적은 꿈은 부모님이라고 인지한 사람들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조차 부모님의 존재에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 꿈은 언제나 급박하고, 초조하고, 두려웠다. 감히 부모님을 불러보지도 못하고, 부모님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깨어나면 눈가는 잔뜩 젖어있었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자리에서 일어나기보다 다시 잠들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레귤러스는 지나간 날들을 세는 것만큼이나 성실하게 꿈에서 본 것을 메모하거나 그려놓았다. 빗자루 모양이나 이상한 사람들의 차림새, 또래들이 모여 있던 공간의 구조, 유난히 기억에 남는 책의 제목(‘블러저 쳐내기’) 등의 메모 사이에서도 부모님에 대한 메모는 ‘부모님’으로 끝날 뿐이었다.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정확한 생김새나 특징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드물게 돌아온 레귤러스의 대답에 성의 없이 종이 위를 긁던 펜이 멈추었다. 레귤러스는 오늘도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한 채 소리로 의사의 행동을 파악하고 있었다. 꿈을 꾸었다는 대답은 처음이 아니었다. 레귤러스에 대한 기록을 한 페이지에 정리해두면 두어줄 정도는 꿈을 꿨다는 대답으로 채워질 정도였다. 꿈을 꾸었어요. 꿈을 꿨어요. 꿈을. 꿈.
손가락으로 멋들어지게 펜을 돌린 의사가 안경 너머로 레귤러스를 응시했다. 상세한 질문을 하진 않았고, 그렇다고 알았다며 병실을 나가지도 않았다. 기묘한 침묵과 시선을 느낀 레귤러스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치곤 단정치 못하게 헝클어진 어두운 갈색 머리의 남자가 서있었다. 그제야 레귤러스는 오늘 처음으로 남자 의사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는 레귤러스의 시선을 받아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자연스레 건너온 인사에 얼결에 대꾸한 레귤러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기억하는 한 누구와도 살가운 인사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평범한 인사가 타인이 자신의 입을 빌어서 대신 한 것처럼 낯설었다. 꿈보다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현실이라니. 꿈에서 보는 부모님 보다 이 남자 쪽이 더.
“또 봐.”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이, 남자는 다음을 기약하며 재빨리 자리를 떴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레귤러스는 한참동안 남자가 서있던 자리와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저 문이 열렸다 닫혔던가? 아니기를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남자에게서 받았던 기분을 해명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정말 미친 게 아닌 이상. 이 현실이 꿈이 아닌 이상.
3.
병실이 지겨워지면 침대에서 나와 공용 휴게실로 향했다. 병원 내부에는 여러 곳의 휴게실이 있었는데, 레귤러스가 자주 가는 곳은 5층 로비였다. 가족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나 잡담을 하는 사람이 가장 적었고, 무엇보다 유일하게 책으로 꽉 찬 책장이 들어선 휴게실이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처음엔 손에 잡히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점차 취향이 생기고, 제목을 읽고, 내용을 훑어보는 여유가 생겼다. 특히나 손이 가는 종류는 동화였다. 전집으로 꽂힌 동화책들은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들이었는데 레귤러스는 생전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로웠다. 늑대를 피해 도망가는 빨간 모자의 이야기를 읽고 있을 때 엄마의 손을 잡고 온 남자 아이가 레귤러스를 가리키며 형이 빨간 모자를 읽는다고 말해 꽤나 민망했지만 읽고 있던 책을 덮지는 않았다.
동화 속에선 말하는 늑대가 있고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 난쟁이가 거인을 물리치고, 먼 나라의 왕자가 공주를 구하러 모험을 떠난다. 있을 리 없는 상황들이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게 좋을 뿐이었다. 동화책에 쓰인 활자 하나, 그림 하나가 현실에 없는 걸 있다고 가정하고 바라는 것쯤은 괜찮다고 변호해주는 것 같아서.
최근 몇 번을 곱씹고 있는 이야기는 피터팬이었다. 낡은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노란색 책장 안에서도 서로 다른 종류의 피터팬만 세 권이었다. 책 디자인만큼이나 생김새는 조금씩 달라도 세 피터팬들은 모두 초록 옷을 입고, 웬디와 아이들의 손을 잡아 어른이 되지 않는 네버랜드로 떠났다. 후크 선장과 악어가 있는 네버랜드. 레귤러스는 네버랜드의 존재가 유난히 친숙했다. 마냥 어른이 되지 않는 환상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과는 달랐다. 꿈속에서 오락가락하는 그 세계가 네버랜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땅에서 발을 떼고 중력을 이겨내 날아가는 세계는 레귤러스가 자주 꾸는 꿈과 비슷했으니까.
물론 네버랜드에 대한 생각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굳이 섣부른 소리를 해서 의사나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봤자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영원히 행복한 네버랜드에 대한 꿈은 아이들의 입에서 나와야 아름다운 것이지 다 큰 청소년의 입에서 나올 게 아니다. 정신 병원이란 장소에선 더더욱.
레귤러스는 반쯤 읽은 책을 무릎에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등 뒤의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좀 더 가까워졌다. 차분히 가라앉은 머릿속에서도 이성은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외쳤다. 피터팬이 인도해주는 환상의 세계라니. 제임스 매튜 배리는 약에 취해 피터팬을 쓴 게 분명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는 아이는 없다. 어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은 어른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신도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현실에 속하고 싶지 않아 안으로, 안으로, 도망치는 것일 뿐이었다. 째깍째깍. 어딘가에서 해안에서 도사리고 있는 악어의 시계소리가 울렸다.
“자?”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귤러스가 퍼뜩 눈을 떴다. 요란한 시계 초침 소리는 어느새 사라졌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는 멀어져갔다. 잠깐 사이에 나타난 갈색 머리의 남자를 보며 레귤러스는 어떻게 반응해야하나 입술을 물었다. 누가 옆에 앉을 때까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공상에 깊게 빠져있었나.
“……아니요.”
“응. 그런 것 같네. 앉아도 되지?”
이미 앉아놓고 양해를 구한다는 소리가 앉아도 되냐니. 레귤러스는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남자의 명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임스 포터. 피터팬의 작가와 이름이 같았다. 미들네임은 없었다.
“피터팬을 좋아해?”
그제야 레귤러스는 제 무릎 위에 동화책을 펴놓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둘러대기엔 크레파스 그림과 큼직한 글씨의, 너무 어린이를 위한 페이지였다. 레귤러스의 당혹스러움을 눈치 챘는지 아닌지, 제임스가 씩 웃더니 레귤러스가 저지할 새도 없이 얄밉게 책을 가져갔다. 레귤러스는 남 몰래 감춰둔 일기장이라도 들킨 기분이었다.
“나도 이거 읽어봤어.”
“누구나 읽는 거잖아요.”
“난 아니야.”
제임스가 킥킥 웃으며 앞부분을 폈다. 피터팬과 그의 친구들이 하늘을 날아 네버랜드로 가는 부분이었다. 난 아니야. 명치를 답답하게 틀어막은 벽이 그 말 한마디에 가려웠다. 제임스도 자신처럼 다 크고 나서야 피터팬을 읽었다는 뜻인 걸까. 아니면 그 이상을 담고 있는 말일까. 그동안 좌절됐던 질문 욕구가 솟구쳤지만 흥미롭게 책을 넘겨보는 제임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선지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네버랜드가 있다고 생각해?”
이번에도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제임스였다. 뚱딴지같은 물음이라 레귤러스는 이번에도 수 초간 제임스의 얼굴을 쳐다보는 게 즉답이었다. 가벼운 미소를 띤 제임스가 레귤러스를 마주보며 무언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계속 생각해 온 화제인데도 막상 물어오니 언어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기다 아니다로 표현하면 될 간단한 질문인데도, 제임스는 어쩌다가 몇 번 본 의사일 뿐인데도.
“나는…….”
목이 탔다. 마른 입술을 입 안으로 물어 축이고 대답에 뜸을 들였다. 어느 날 담당이 바뀌어 만나게 된 제임스가 왜 이렇게 기껍게 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동안 레귤러스가 겪은 사람들은 레귤러스를 유령취급하기 바빴다. 자신은 깨어 있으면 공상 속에서, 잠들면 꿈속에서 이곳이 아닌 세계를 새기느라 바빴다. 서로 너무도 바빠 생기는 균열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틈을 매울 사람이 있다면,
“있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나타나 같이 피터팬을 읽어주는 당신이 아닐까 하고.
4.
혼자 사용하는 4인실의 밤은 썰렁했다. 너무 추운 겨울만 아니면 레귤러스는 밤새 창문을 열어놓고 잠에 들었다. 그 때문에 감기에 자주 걸렸지만, 감기보단 혼자 보내는 밤을 이겨내는 게 훨씬 어려웠다. 레귤러스는 오후에 보았던 제임스에 대해 떠올리며 약품 냄새가 나는 이불을 덮었다. 어쩌면 제임스는 그냥 특이한 의사일지도 몰랐다. 나이가 젊으니 자신이 맡은 환자에게 특별히 정감가게 구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환자에게 공감해주는 건 의사의 기본 소양이라고 들었다. 그 때문일 텐데, 저도 모르게 제임스에게 제 속마음을 모두 드러내버린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네버랜드가 있다고 생각하는 레귤러스의 대답을 들은 제임스는 좋은 대답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금방 자리를 떴다. 그가 회진 때마다 레귤러스의 병실에 들어왔다 나가는 것처럼 순식간이었다. 좋은 대답이라는 건 뭘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좋은 태도라는, 뭐 그런 걸까. 제임스가 피터팬을 원래 읽지 않았다는 건 무슨 뜻이었을까. 막상 묻지 못해 어지럽게 섞이던 질문들이 하나씩 정리되었다. 당신도 피터팬을 다 커서 읽었어요? 다른 책은요? 당신은 왜 내게 말을 걸어요? 당신은 네버랜드가 있다고 생각해요?
정신을 차리니 한밤중이었다. 어렴풋이 정신이 먼저 깬 틈을 타 쌀쌀한 바람이 이불 사이로 스며들어 레귤러스는 몸을 한껏 웅크렸다. 늦봄의 밤이라 가벼운 추위쯤은 무시하고 잘 수 있을 텐데 침대와 몸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이 점점 집요해졌다. 눈도 뜨지 않고 버티려던 레귤러스가 결국 창문을 닫기로 마음먹고 덮고 있던 이불을 걷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고 일어나 앉아 창문 쪽으로 손을 뻗어서, 그 다음은, 유리창을 닫기만 하면 됐을 터였다.
“지금 기분은 어때?”
닫기만 하면 됐는데. 창틀에 사람이 앉아있어서 그러질 못했다. 레귤러스는 졸린 제 눈이 헛것을 보는가 싶어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떴지만, 창에 걸터앉은 제임스는 진짜였다. 제임스는 병원에서 늘 입고 다니던 하얀 의사 가운 차림이 아니었다. 제임스의 무릎까지 길게 내려오는 까만 망토는 매우 낯이 익었다.
“오, 굳이 대답 안 해도 돼. 표정만 봐도 알겠다.”
이건 꿈일까. 제임스에게 물을 질문을 되새김질하며 잠들었으니 제임스가 꿈에 나오는 것도 그럴 법 했다. 매일같이 웬디를 찾아오는 피터팬의 이야기를 생각했으니 달 밝은 밤이 배경인 것도 그럴듯했다. 매일 같이 꾸는 꿈이, 꿈이 아닌 현실 같다는 것도.
“데리러 왔어. 이젠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그럴 필요가 없어졌고.”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것도 그럴 수 있었다. 애초에 세상 누구든 자신이 아는 얘길 해준 적도 없었다. 가슴이 앞으로 펼쳐질 달리기를 예감하듯 세차게 뜀박질을 시작했다. 집요하던 바람은 어느새 살랑거리며 제임스의 목소리와 함께 귓전을 희롱하고 있었다.
“네버랜드가 있다고 해줘서 고마워. 네가 그렇게 말해서 데려갈 확신이 들었지. 넌 역시…….”
“정말 있어요?”
자제력을 잃고 튀어나간 레귤러스의 물음에 제임스가 달을 등지고 미소를 지어, 레귤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버랜드는 없지만, 네가 원래 속한 세계는 있어.”
레귤러스는 제임스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진짜 현실은 뭐고 내가 속한 세계는 뭘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의 호기심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으로 레귤러스도 제임스를 향해 당연히 손을 내밀었다. 그 곳의 이름이 네버랜드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지옥이라도 괜찮을 거다. 소속감을 잃고 이방인으로 남는 것이 끔찍하게 싫을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있을 올바른 세계로 이끌어 준다면, 그게 초록옷의 피터팬이 아니라 검은 망토의 제임스 포터라도 아무 상관없었다.
“데려가줘요.”
당신이 말하는 나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가 정말이라면 내일 아침엔 멍하니 바보 같은 기분으로 침대위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될 거다. 레귤러스가 누구인지, 내가 무얼 해야 하는 사람인지도 알게 되겠지. 달이 여덟 번 찼다 스러진 끝에야 도달한 피터팬의 인도로.
제임스가 레귤러스의 손을 꽉 잡아 끌어당겼다. 순간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반짝 하고 두 사람을 감싼 큰 빛이 켜졌다 꺼졌다. 뒤엔 정적이었다. 누군가 밀쳐낸 이불과 늦봄의 어두운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과 유월의 달력만이 하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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