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이와] 너와 나의 거리 (side M)
너와 나의 거리 (side M)
마츠카와 잇세이松川 一靜 X 이와이즈미 하지메岩泉 一
*성적 단어와 묘사가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마츠카와 잇세이는 최근 심기가 불편했다. 봄고 예선 준결승에서 탈락한 뒤 처음으로 깨달은 바였다. 그건 중학생 때부터 해 온 배구에서 전국에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수험을 위해 배구에 쏟았던 시간만큼을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묘하게 속 가려운 느낌이 가시지 않는 느낌. 그 이유를 알아챈 순간과 장소는 침대 위에서였다. 침대. 시간과 공간을 교묘하게 압축한 좋은 사물. 거기에 짐승처럼 얽힌 두 사람분의 숨소리까지 더한다면 그보다 더 은유적이고 정확할 수 없었다. 인터하이도, 봄고 시합도 수업을 빼먹고 응원하러 왔었다고 말하는 여대생의 목소리는 침대 위에서 유독 교태로웠다.
꽤 오랫동안 봐온 굴곡 있는 알몸을 몇 번이고 안으며, 마츠카와는 나이는 참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더랬다. 몇 번의 데이트에서 그녀는 자신이 누나임을 과시하기 좋아했다. 마츠카와가 미성년자이기에 돈 쓰는 걸 싫어했고, 비싼 음식 먹는데 생색을 냈으며, 평일에 시간을 낼 수 있는 자유를 특권으로 생각했다. 정작 살을 섞는 순간엔 미성년자보다 더한 것을 원하면서. 침대 위에서의 그녀는 한 없이 욕심 많은 소녀였고, 마츠카와 또한 한창 때의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츠카와에게서 모든 걸 빼내고 싶어 했지만, 마츠카와는 그녀가 어떤 사실 하나를 끝까지 알아채지 못했을 거라는 걸 자신했다. 그녀가 응원하러 온 여러 번의 경기에서 그와 같이 코트에 서있는 다른 한 명 또한 마츠카와와 몸을 섞는 관계라는 걸.
이와이즈미와의 섹스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나 물기 있고 끈적한 여자와의 잠자리하곤 달랐다. 신체구조상 '물기'라는 의미가 꽤 달랐지만, 차이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여자친구'는 한 번의 잠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이 마츠카와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이와이즈미는 한 번이면 족하다는 듯, 언제나 행위가 끝나면 황급히 자리를 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범하는 쪽이 마츠카와라는 건 본인도 부정할 생각이 없는데 두 사람의 마지막에 강간이라도 한 것처럼 구는 사람은 이와이즈미였다. 처음엔 부끄러워서인가 싶어서 귀엽단 생각을 했지만, 섹스를 거듭할수록 이와이즈미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게 보였다. 그렇다고 붙잡은 적은 없었다.
‘이와이즈미인가.’
마음이 뒤틀리는 이유를 깨달은 순간은, 그래, 아이러니하게도 여자 친구와의 잠자리에서였다. 제 멋대로 흔들리는 가슴만큼은 아직 손이 저절로 갈 정도로 좋았지만 부러 짜고 흔드는 교성은 싫증나는 참이었다. 이와이즈미와 마지막으로 살을 섞은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들의 봄고가 끝나기 전이란 것만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봄고 이후 마주친 적도 드물었다. 부활도 필수가 아니었고 마츠카와는 1반, 이와이즈미는 5반. 좁은 학교에서 물리적 거리로 따지자면 꽤 먼 편이었다. 봄고가 끝나기 전엔 오이카와와 하나마키와 함께 꽤 몰려다녔던 것 같지만, 최근은 팀으로서가 아닌 각자의 길에 집중하게 되면서 그마저도 뜸해진 참이었다. 시간이 지난다는 건 그런 거였으니까.
그래서 마츠카와는, 묘하게 뒤틀린 속을 바로잡기 위해 이와이즈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와이즈미와는, 이를테면 파트너였다. 일상의 무료함을 해소해주는 존재. 배구가 없어지고 여자 친구에게 싫증을 느끼는 지금, 가장 타는 목을 식혀 줄 소다를 떠올리게 하는 청량감이 그에겐 어울렸다. 오이카와와 하나마키를 사이에 두고 아슬아슬하게 눈빛을 건네거나, 부활이 끝나 당장 여자 친구가 손에 닿지 않아 시선의 딱 한 층만큼 작은 이와이즈미의 손목을 낚아채거나, 장소를 가리라며 으르렁대는 그의 입을 손가락으로 막고 급하게 교복 벨트를 풀어내거나.
3학년 5반. 교실 안에서 이와이즈미의 자리는 교실문과 정 반대에 있는 창가였다. 점심시간인데도 이와이즈미는 꽤 공부에 열중한 모습이었다.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에 쥔 펜으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는 옆얼굴이 역광으로 다소 어둡게 비치었다.
“잘 돼?”
“……대충.”
시원찮은 반응이었다. 이와이즈미 주변의 자리는 전부 비어있었고 교실에 남아있는 학생 수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마츠카와가 사람 한명이 지나갈 복도를 사이에 낀, 이와이즈미의 옆자리를 택한 이유는 이와이즈미의 열중하는 옆얼굴이 좋아서였다.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이와이즈미는 그 옆얼굴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묵묵히 필기를 계속했다.
그쯤 되니 옆 자리가 아닌 앞자리를 차지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츠카와와 이와이즈미가 단 둘이 대화하는 자리라면 그 목적은 뻔했다. 이와이즈미도 알고 있을 터였다. 교실이라 그래서일까. 그래서 모른 척 하는 건가. 마츠카와의 입가에 특유의 느긋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앉은 의자를 복도 쪽으로 반쯤 끌어당겼다. 마츠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와 같은 대학에 가기 위해 꽤나 노력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현 내 최고 세터의 콤비로 불리면서 알게 모르게 책임감을 느끼는 것도 간파하고 있었다.
“대학 가서 오이카와 뒤치다꺼리 할 거야?”
“무슨. 그 녀석이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거다.”
“네가 엄마라고 하고 다니더니, 진짠가 보네.”
장난처럼 던진 말에 이와이즈미가 욱하려는 순간 마츠카와의 손이 이와이즈미의 오른쪽 손목에 닿았다. 습관처럼 짜증을 내려던 이와이즈미의 입술이 굳었고 시선이 손가락을 타고 옮아왔다. 딱 기분 좋은 거리였다. 손바닥과 손목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그 거리는. 언제든 잡아 챌 수 있는 거리.
“떼라.”
그랬을 텐데.
거부의 언어는 여느 때보다 더 단단했다. 음, 돌이긴 했지. 바위든 돌이든. 뭐하는 거냐. 하지 마라. 관둬라. 지금은 아니야. 마츠카와는 매번 이와이즈미의 거절의 단계가 점차 약해지는 걸 즐겼기 때문에 늘 개의치 않았다. 마츠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서 신선함을 요구하는 만큼 그들이 욕정 하는 장소도 침대 위 같이 정형화 된 곳이 아닌 경우가 허다했다. 동료들이 낄낄 대며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 문 뒤에서, 분한 듯 울음을 삼키며 사정하는 이와이즈미의 떨림을 즐겼던 적도 있었다. 이와이즈미의 거절 의사는 마츠카와에게 요리의 향신료 같은 풍미를 더해주는 역할이었다.
“너랑 이제 안 해.”
찰나였다. 순간이었다. 뭐든 좋았다. 반응하기도 전에 이와이즈미가 마츠카와의 손을 떨궈냈다. 펜을 놓지 않은 채 팔만 움직이니, 제 손이 이와이즈미의 손목에서 쉽게 떨어지는 것을 본 마츠카와가 잠시 말을 삼켰다. 이와이즈미는 생각 이상으로 단호했고, 자신은 예상 이상으로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둘 다 예상 밖의 상황이라 다시 필요 이상으로 힘을 주어 이와이즈미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와이즈미가 쥐고 있던 빨간 펜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고작 몇 백 엔짜리 펜이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며 잉크를 질질 흘렸다. 자신이 그렇게 세게 이와이즈미를 낚아챘다는 걸 마츠카와가 인지하기도 전에, 이번에도 이와이즈미가 그보다 빨랐다.
책상 위에 있던 노트와 교과서가 파삭파삭, 눈앞에 피어올랐다가 떨어졌다. 하얗게 타오르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불꽃마냥. 교과서의 모서리에 이마를 맞았는지 열에 덴 건지 이마가 화끈거렸다.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표정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눈앞에 튄 것은 불꽃 하나였다. 과격하게 책상을 비워낸 이와이즈미의 행동에 교실에 몇 없던 다른 이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개자식.”
씹어 뱉은 욕설처럼 흩어진 제 물건들을 주워 담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이와이즈미가 그대로 자리를 떴다. 마츠카와는 주위의 수군거림에 곤란함을 느꼈다. 다른 이들이 자신들에 대해 떠드는 것보다, 이와이즈미의 행동 때문이었다. 거부가 아닌 단절이었다. 이와이즈미가 거부하면 마츠카와는 밀려난다. 그만큼 멀어진 거리는 다시 좁히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외면당해 버석버석하게 썩어가는 부식은 달랐다. 단호함에 좀 먹힌 길이 끊어지면 그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무한대였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웅성거리는 소리보다 명확하게 와 닿는 줄기는 하나마키의 목소리였다. 다소 꼴좋다는 투가 섞인 친구의 말에 마츠카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3반의 하나마키가 왜 5반에서 이 사단을 구경하고 있는 진 몰랐지만, 입 꼬리를 잔뜩 올려 웃고 있는 모양새를 보니 유쾌하진 않았다.
“나?”
“아니, 이와이즈미.”
이와이즈미잖냐. 히죽 웃은 하나마키가 몸을 숙여 책 주인 대신 흩어진 노트와 교과서, 필기구 따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츠카와는 도와줄 생각은커녕 발에 차이는 노트를 대충 미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이와이즈미? 이와이즈미가 왜?
솔직한 심정으로 이와이즈미가 뭐에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설마 몸을 섞는데서 연애 감정을 기대하기라도 한 건가. 그 이와이즈미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이와이즈미를 포함해서 마츠카와가 연상의 여자와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어차피 암묵적으로 서로 동의한 관계가 아니던가.
시작은 자신이 했으니 끝은 이와이즈미가 선언해도 나름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언제든 찾아들 수 있는 섹스 파트너의 관계 따위, 약간의 아쉬움만 남긴 채 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이와이즈미의 과민 반응도 의외로 섬세하네, 하며 웃어넘기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엉망이 된 자리를 정리해주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성인이 되어 고교를 졸업하면 그걸 핑계로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는 시점이었고, 생각하니 이와이즈미가 시기를 참 잘 잡았다 싶었다. 문제는 약간의 아쉬움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내가 그만 두고 싶지 않은 건가?’
마츠카와가 혀를 찼다. 속이 뒤틀렸다. 이 관계를 억지로 비틀어 주도한 이유는 나름대로 너에게도 권리를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나름의 공평을 부여해 스스로도 납득할 이유를 네가 내게 부여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그건 오이카와가 입버릇처럼 자신은 천재를 싫어한다고 말한 것과 같았다. 이와이즈미, 너도 싫어할 테지. 코트 위에서 오이카와가 재능덩어리 후배를 시기한 것처럼, 알게 모르게 너는 왼손잡이 에이스를 상대로 고군분투 했을 터였다. 그게 꺾인 지금 내가 너에게 감히 공평함을 매듭지어줄 처지가 되는 걸까. 어불성설이었다.
하나마키의 손으로 이와이즈미의 자리는 자리 주인이 없을 뿐이지 원래 상태로 복귀되어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보고 있던 페이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아주 정확하게도 펴두었다. 하나마키가 보란 듯이 노트 한 구석을 툭툭 건드리고, 이어서 마츠카와의 어깨도 툭툭 쳤다. 학급원들의 흥미는 두 사람의 사건으로부터 이미 멀어져있었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잡아 둬야할까. 마츠카와의 눈에 두 발로 편히 걸었던 길은 외줄마냥 좁디좁게 바스라 들고 있었다. 아주 예전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외줄이었을지도 모르는 길을 혼자만 착각했던 걸지도 몰랐다. 다만 처음과 다른 점이라면, 마츠카와는 그 줄을 끊어지게 둘 생각이 없었다.
'글 > 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이큐/센티넬버스au] (0) | 2015.12.02 |
---|---|
[마츠이와] 아홉 번째 첫눈 (0) | 2015.11.28 |
[오이츠키] 꽃 (0) | 2014.09.13 |
[시리무] (0) | 2014.08.23 |
[제레귤] 문신 (0) | 2014.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