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무] 요시와라 라멘토5
요시와라 라멘토5
시리무
리무스가 스무살이 된 그 해부터 제임스와 시리우스, 레귤러스는 펜리가 없어도 요시와라에 자주 오기 시작했음. 레귤러스는 일이 바빠서 거의 오지 않았지만 시리우스랑 제임스는 일주일에 한번 꼬박꼬박 찾아오는 꼴이었음. 올 때마다 리무스를 불러서 셋이서 자주 떠들고 놀았는데, 리무스는 자기가 일해야하는데 너무 재미있게 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처음엔 눈치가 많이 보였음. 그런데 앨리스가 흔쾌한 얼굴로 그것도 일이고 일을 할 때 즐겁다면 더할나위 없지, 라고 해줬음. 리무스는 그런 앨리스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고 가슴 한쪽에서 생전 처음으로 기쁜 마음이 몽글몽글 부풀어 올랐음.
다른 업소 여자들 없이 셋이 만날 때마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음. 제임스는 프리랜서 프로그래먼데 레귤러스가 현재 하는 일에 레귤러스에 의해 고용 되서 돕고 있다고 해줬음. (여기서 리무스의 의문: 레귤러스는 바쁘다고 잘 안 오는데 제임스는 어떻게 꼬박꼬박 오지?..)주로 제임스의 일을 듣는 편에 속했는데, 한번은 리무스가 시리우스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봤음. 대답한건 시리우스가 아니라 제임스에게서 왁자한 웃음과 함께 나왔음. 시리우스는 일을 안 해, 백수야. 조용히 술을 마시던 시리우스가 제임스 뒷통수를 보기 좋게 갈겨줬지만 제임스는 굴하지 않았고 리무스는 웃음을 터트렸음.
시리우스는 오리온 블랙의 장남이지만 권위주의적인 가문에 늘 불만을 품고 있었음. 동갑내기이고 마음이 잘 통했던 안드로메다 블랙과 사이가 좋았는데 그녀가 블랙 가문이 정해준 약혼자와의 약혼을 발로 차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한 뒤에 블랙 가를 박차고 나갔음. 그러고 나니 시리우스는 저도 답답한 마음이 더 커졌고 결국 22살이 되기 전에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집에서 나와 살고 있었음. 일 안해도 친한 삼촌의 지원으로 충분히 먹고 살만한 돈은 있었고 가끔 무료하다 싶으면 이런 저런 알바를 전전했음. 그건 시리우스에게 있어서 새로운 도전이자 경험이었음. 나름대로 그런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고.
시리우스가 유일하게 가문하고 연결되어 있는 점은 삼촌 외에 남동생 레귤러스 였는데, 시리우스가 사는 곳은 (역시 삼촌 외에) 레귤러스만 정확히 알고 있었고, 레귤러스는 가끔 찾아와서 잔소리를 많이 함. 형이 무슨 사춘기 반항아냐,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그냥 들어와서 회사 받을 준비나 해라, 항상 똑같은 래퍼토리로 일관했고 그만큼 시리우스도 너는 짖어라 나는 안 듣는다 태도로 일관했음. 시리우스가 레귤러스를 접점으로 남겨둔만큼 레귤러스도 내심 시리우스를 존중하는 모양인지 억지로 끌고 가거나 부모님에게 시리우스의 소재를 알리지는 않았음. 블랙 형제의 사이는 겉으론 으르렁 거려도 가끔 연락하고 밥도 먹고 할 정도로 특별하게 나쁘지는 않았음. 특히 레귤러스는 살살 달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할 요량으로 계속해서 일자리를 알아주는데 시리우스가 번번이 거절함.
처음 펜리 그레이백이랑 그들이 요시와라에 왔을 때는 제발 레귤러스가 알바 말고 직장을 가지라고 그래야 체면이 서지 않겠냐고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줄 테니까 얘기만 들어보라고 억지를 부려서 온거였음. 제임스는 시리우스 절친인데 레귤러스가 제임스한테 형 설득 좀 해달라고 하니까 제임스 딴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따라온거였고... 근데 사실 그날 제임스는 레귤러스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로 행동해서 레귤러스한테 무지하게 욕먹었음... 레귤러스가 두사람한테 뭐라 하면서 도대체 왜 그러냐고 욱 하니까 제임스와 시리우스가 동시에 말했음. 그레이백이 마음에 안 들어서.
요시와라에 처음 온 날 얘기는 빼고 시리우스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얘기만 제임스가 낄낄대고 약간 과장하면서 리무스한테 해줌. 시리우스는 제임스가 말하는 동안 쓸데없는 얘기를 한다고 핀잔을 주거나 제임스가 과장하는 대목에서 제지하는 정도로 이야기에 끼어들었지만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았음. 자기 가문이 싫다는 점에선 전적으로 동의하며 술이나 홀짝홀짝 들이켰고 리무스는 그런 시리우스를 간간히 쳐다보면서 제임스의 이야기를 들음.
리무스는 얘기를 들으면서 시리우스에 대해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음. 그 좋은 배경과 지위를 박차고 나온 게 어지간히 살기 편했구나 싶어서 심술이 나기도 했지만, 또 나와서 나름대로 일을 했다는 부분에선 누그러지기도 하고, 또 그렇게 나와서도 윤택한 삶을 살고 있다니 샘도 나고...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 들었음. 왠지 잠잠하던 속이 들썩여서 꿀렁거리는 기분이라 홧김에 제 앞에 놓인 술을 벌컥 마셨음.
제임스가 오오~ 하면서 감탄하고 시리우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픽 웃고 말았음. 제임스랑 시리우스가 몇 번 리무스랑 대화를 하면서 리무스한테 술을 권했지만 늘 거절당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나 싶었음. 묻진 않고 더 부추기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문제긴 했지만... 리무스는 처음으로 입에 댄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는데 생각 외로 화끈 거렸음. 이런 걸 단 거 마시듯이 잘도 마시는게 신기할 정도였음. 그런데도 뱃속에 일어난 불길을 잠재우는 알싸함이 신기했음. 솔직히 맛은 더럽게 없었지만.
처음 마신 술에도 리무스는 취기가 좀 올랐고 말이 꽤나 많아졌음. 원랜 제임스나 시리우스가 하는 말에 맞장구 치는 것도 잘 안했는데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농담에 시원하게 웃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고 여러모로 많이 풀어진 모습이었음. 절정은 옆자리에 앉아있는 시리우스 허벅지를 손으로 툭툭 때리면서 부럽다고, 억울하다고 그 말만 반복하는 거였음. 제임스가 와, 리무스 진짜 취했네 하면서 더 마시게 하려는걸 시리우스가 제지함. 그만 마셔라. 시리우스의 목소리에 리무스가 감기는 눈을 치뜨려고 노력했음. 자꾸만 시야 안에 잡히는 시리우스의 얼굴이 흐릿했고 덕분에 화를 내는건지, 걱정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음. 응, 알았어. 화내지마... 가물거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 대답을 마지막으로 필름이 끊김. 정신을 차리니 자기 방에 누워있었고 새벽이었음. 머리가 너무 아파서 끙끙거리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데 주정 부린 일이 드문드문 생각나서 리무스는 가지런히 베고 있던 베개에 머리를 박았음. 미쳤네. 미쳤지 리무스 루핀. 진짜 쪽팔려서 고개를 못들 지경이었음. 그대로 두통에 이리저리 헤매다가 한두시간정도 잠을 더 자버리고 숙취에 쩔어서 일어났음. 숙취에 징징댈 순 없으니 느릿느릿 아침을 먹고 빨래나 방정리 같은 일과를 해냈음.
리무스를 주기적으로 찾는 손님은 펜리나 시리우스 일행 정도였는데 어느 시점 이후로 톰 리들이 찾아옴. 리들은 혼자 힘으로 자수성가한 타입인데 그 방식이 비열하고 뒷공작이 많아서 얘기가 많았음. 그래도 워낙에 손도 크고 막 성장하는 세력이라 대놓고 태클을 걸만큼 배짱있는 사람은 없었음. 덕분에 승승장구하는 중이었고.
리무스가 리들을 알게 된 건 그가 펜리와 같이 왔기 때문이었음. 리무스는 펜리의 옆에 있었고 리들의 옆에는 벨라트릭스가 있었음. 리들은 벨라트릭스에게 보이는 것만큼의 적당한 관심을 리무스에게 보였고 리무스 또한 불편한 자리를 티내지 않고 얌전히 있었음. 사실 펜리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리들을 관찰하거나 신경쓸 여력은 없었지만.
펜리와 함께 올 때가 아니라도 리들은 종종 요시와라에 혼자 찾아오기도 했음. 그 때마다 벨라트릭스와 리무스를 불렀는데, 둘이 같이 부를 때도 있고 따로따로 부를 때도 있었음. 벨라트릭스는 리들을 여러 의미로 차지하고 싶어 했음. 그가 마음에 든다고, 그도 자기에게 푹 빠진 거라고 떠들고 다녔고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만큼 리무스를 눈엣가시로 여겼음. 리무스는 리들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없었기 때문에 벨라트릭스의 견제가 아주 껄끄러웠음. 남과의 마찰을 극도로 꺼려하는 리무스였기 때문에 벨라트릭스의 시비도 모른척 무시하고 지냈지만 스트레스가 상당했음. 벨라트릭스는 리들 앞에서도 서슴없이 리무스를 깎아내리면서 저를 치켜세우고, 리들의 눈에 들기를 원했음.
언젠가 제임스가 리무스에게 리들이 온다며? 만난 적 있어? 라는 화두로 물었을 때 시리우스가 아주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음. 제임스는 리들에 대한 평가를 이렇다, 저렇다 하고 딱 갈라서 내보이지 않았고 그 자리에 있었던 레귤러스는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정했음. 하지만 리무스는 벨라트릭스가 싫어도 리들을 싫어하지는 않았음. 시리우스가 말한 것만큼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리들은 일개 업소 여자들이나 직원들을 대할 때도 젠틀하고 친절했기 때문이었음. 특히 리무스를 불러서 대화를 할때마다 너라면 어땠겠어? 나라도 그럴 거야, 하는 식의 대화법은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음. 리들은 리무스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것 같았고, 일 할 때의 얘기라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음. 리무스 개인적으론 제임스나 시리우스와 있을 때는 또 다른 흥미로운 자리였음. 다만 시리우스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리들에 대한 솔직한 평가는 리무스도 그의 앞에선 하지 않았음.
그렇게 시리우스와 제임스, 레귤러스, 펜리, 리들, 그 외의 사람들이 번갈아 찾아오고 지내면서 시간이 훌쩍 지나갔음. 겨울이 끝나고 봄이 다가옴과 비슷하게 3월 10일이 찾아왔음. 리무스의 생일.
매해 크게 축하한 건 아니었지만 앨리스는 생일만큼은 일도 굳이 시키지 않았고, 자유롭게 놀아도 된다고 허락해주었음. 그동안 리무스는 딱히 놀러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어서 요시와라 안에서 조용히 쉬기를 택했고, 친한 업소 여자들이나 몇 명 챙겨주는 정도였음. 리무스는 그걸로도 충분히 행복한 생일이었고.
올해 3월 10일에도 리무스는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끼니를 챙기고 먼저 쌓인 빨래를 했음. 빨래를 하고 뒷방 정리도 하니 어느새 10시가 다 되었고 좀 쉬려고 자기 방으로 가는데 도중에 앨리스를 만남. 앨리스는 생일 축하한다고 하면서 리무스를 찾아 온 사람이 있다고 했음. 앨리스를 따라서 요시와라의 입구로 간 리무스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음. 시리우스가 현관에 서있었음.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서있는 리무스를 발견한 시리우스가 씩 웃으면서
생일 축하해.
라고 함. 리무스가 멍청하게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었음. 시리우스가 어이없단 듯 웃으며 네 생일이잖아, 축하해주려고 왔지. 하면서 리무스에게 들고 온 꽃다발을 한 아름 안겨주었음. 오는 길에 꽃집이 열었길래 사왔어. 얼떨떨하게 받아든 꽃다발엔 빨갛고 노란 장미꽃이 한데 섞여있었음. 난생 처음으로 받아본 꽃 선물이라 어쩔줄 모르고 얼굴이 확 달아 오르는 기분에 고개를 꽃에 가리다시피 한채 고맙다고 대답했음. 시리우스가 그 대답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어색한 짧은 침묵 후에 앨리스에게 시선을 돌리고 오늘도 리무스 일 해야 하냐고 물었음. 앨리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면서 아니라고 대답했고, 시리우스가 그럼 나가도 되겠네. 라고 함.
나가? 리무스는 생소한 표현을 곰곰이 속으로 곱씹었음. 요시와라에 온 뒤로 리무스는 저 밖을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었음. 나갈 필요도 없었고, 나가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음. 시리우스가 리무스를 쳐다보고 다시 말했음. 나랑 놀러 가자.
사실 겁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두근두근했음. 엄청난 모험을 앞둔 어린 소년마냥 발개진 얼굴로 시리우스를 보다가 앨리스를 보았고 앨리스는 흔쾌히 가도 된다며 리무스의 어깨를 토닥여주었음. 리무슨느 오랜만에 유카타를 벗고 거의 의미가 없었던 외출복을 꺼내 입었음. 가벼운 와이셔츠에 청바지뿐이었지만 기분은 황금으로 만든 옷을 입은 것마냥 설렜음. 다녀오겠습니다. 리무스가 인사하니 앨리스가 답해줬음. 잘 다녀 오렴.
리무스는 시리우스가 몰고 온 차 조수석에 앉는 것도 너무 어색했음. 무슨 문명하고 아주 동떨어져 산 생활도 아니었는데 막상 나오니까 바깥 공기랑 실내 공기가 다른 것 같고...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하고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음. 조수석에 앉아서 제가 나온 요시와라 건물을 생소하게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운전석에 올라탄 시리우스가 리무스한테 벌써 돌아가고 싶어? 하고 한마디 툭 던졌음. 그게 아니라... 적당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리무스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시리우스가 리무스의 안전벨트를 채워주었음.
가고 싶은 데 있어?
가고 싶은데. 선택권을 쥔 리무스는 머릿속이 백지가 됐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원하는 곳에 간 적도 없고 그것도 정말 어렸을 적이라 어딜 특별하게 놀러간 기억도 없었음. 그저 하루하루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으면 그게 최고였으니까.
아는 데가 있어야 가지.
리무스가 멋쩍게 대답하고 안전벨트를 만지며 앞만 보았음. 시리우스가 그런가. 하고 짧게 대답하더니 시동을 걸고 출발했음. 어디로 가는데? 가보면 알아.
열어둔 창문으로 기분 좋은정도의 부드러운 바람을 느끼며 리무스는 시리우스의 얘기를 들었음. 제임스는 같이 오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못왔다고. 생일 축하한다는 말 전해달라고 하더라는 말에서 시작한 제임스와 레귤러스의 근황 같은 것들이었음. 제임스가 레그 놈 추천 받아서 하는 일이라 제대로 안하면 가만 안 둘 거라고 하더라. 오늘은 뺀질 거리지도 못하겠네? 그러겠지. 레귤러스, 일에는 엄청 빡빡해보이던데. 어, 일에 환장한 놈이야. 리무스는 시리우스나 레귤러스가 서로한테 격한 표현을 쓰는데 적응하니 그럴 때마다 웃음이 나왔음. 형제는 좋은 것 같아. 리무스가 킥킥 거리면서 말하니까 시리우스가 진심이야? 라며 심각하게 되물었음. 그 반응에 리무스는 웃음이 터졌고.
의외로 둘만 있어도 대화가 진행됬고 리무스는 더할나위 없이 편안한 기분을 느꼈음. 사실 넷이나 셋이서 만날 때 대화 주도는 언제나 제임스가 하고 있어서 시리우스와 있으면 어색하지 않을까 했는데, 시리우스가 말을 하는 것도 물론 자신이 어렵지 않게 시리우스와 말을 맞추고 있다는게 신기했음. 이게 생일의 분위기 때문에 가능한 마법이라면 매일이 생일이길 바랄 정도로.
다 왔어. 시리우스의 차가 멈춘 곳은 놀이공원이었음. 이런저런 놀이기구가 많은 놀이공원 맞음. 시리우스 왈, 애들은 여기서 놀면 좋아해.리무스가 눈을 곱게 흘겼음. 내가 애라는 거야? 시리우스는 못들은 건지 대답을 피하는 건지 차에서 내렸음. 안전벨트를 풀고 내린 리무스를 데리고 매표소로 가면서 네 생일이니까 하고 싶다는 거 다 해줄게, 라고 함. 애 취급이 걸렸지만 솔직히 리무스 기분이 너무 좋아서ㅋㅋㅋㅋ 그러려니 수긍했음. 한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이기도 하고. 막상 앞에 두니까 정말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평일 낮이라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았음. 리무스는 처음 와보기도 하고 뭐가 재밌을지도 모르고, 도전의식이 그렇게 투철하지도 않아서 어디로 가야할지 우물쭈물 하고 있었음. 사실 시리우스도 본인이 흥미가 있어서 온게 아니고 그냥 다들 좋아한다길래 온 건데 막상 들어오니까 아는 것도 없고...ㅋㅋㅋㅋㅋ일단 되는대로 리무스 손잡고 저거 탈까. 하고 가까운 데로 데려갔음.
놀이 공원에는 유난히 다양한 종류의 롤러코스터가 많았음. 굴곡이 엄청난 레일을 가진 롤러코스터도 있고, 발판이 없어서 공중에 붕 뜬 느낌으로 달리는 롤러코스터도 있고. 무턱대고 저거 재밌겠다며 두 사람이 먼저 탄 것은 그 발판 없는 롤러코스터였음. 시리우스는 저게 무서워봤자 뭐 얼마나 무섭겠어? 이거였고 리무스는 안전한 거 맞나.. 싶어도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고 시리우스가 가자고 하니까 이왕 온 김에,라는 생각으로 탔음. 빠르기도 빠르고 쑥 돌기도 하고 하는 스릴감을 리무스는 생전 처음 맛봤음. 처음엔 겁났는데 그 짧은 시간에 적응을 마치고 진심으로 즐겼음. 무섭진 않았고 기분 좋은 비명도 질렀음ㅋㅋㅋ신나게 타고 내려와서 재밌다! 하는데 무심하게 그래? 할 것 같았던 시리우스가 순간 비틀했음. 깜짝 놀라서 리무스가 잡아주고 괜찮아? 많이 무서웠어? 해주는데 리무스 표정은 걱정이 밥풀만큼도 없었음.시리우스가 괜찮다고 말은 해도 표정은 멀미하기 직전 이었고 리무스는 그게 너무 의외로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고 웃겼음. 시리우스 놀이기구 잘 못 타는구나? 피식피식 새는 웃음을 구태여 참지도 않고 리무스가 킬킬 댔고 시리우스는 좀 볼멘소리로 멀미에 약해, 하고 변명했음. 그래? 그럼 저거 타러 갈래? 만만찮은 다른 놀이기구를 가리킨 리무스였고 시리우스는 그래... 하고 반쯤 끌려가다시피 따라갔음. 그렇게 거의 하루 종일 열심히 두 사람은 놀이기구를 탐. 사실 열심히 타면서 즐긴 건 리무스였고 시리우스는 네 번째 탑승을 끝마친 뒤에 이 놀이공원에 롤러코스터 종류가 4개로 끝난다는 사실에 가슴 깊이 감사함을 느꼈음. 또 내심 걱정했는데 리무스가 재미있게 즐겨주고 있다는 사실에도 안도하고, 그것만으로도 됐다고 생각했음.
이것저것 구경하고 놀면서 리무스는 편안함이나 안정감 대신 스릴이나 즐거움을 많이 느꼈음. 신선하고 자극적인 경험도 시리우스가 있으니 가능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음. 물론 시리우스가 지탱해준다기보다 그냥 보면 자신이 타기 무서워하는 시리우스를 다독이면서 타는 꼴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좋았음. 혼자라면 이런데 올 수도 없었고, 탈 엄두도 못 냈을 테니까.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음. 외식에 대한 기억이 진짜 까마득해서 스테이크를 먹는데 기분이 영 어색했음. 시리우스는 이런데 음식은 역시 맛이 없어, 하면서 먹고 있었고. 리무스는 문득 마주 앉은 시리우스를 보는데 지금 놀이공원에 다 큰 남자 둘이서 놀러온 상황을 깨달은 거임. 오전부터 생일이라고 축하해주고 생일선물이랍시고 놀게 해주고 하니 백번 양보해서 리무스는 괜찮다 해도 시리우스가 괜찮은지는 짐작할 수 없었음. 실제로 레스토랑 안에서 몇 없는 손님들이나 직원들이 시리우스를 흘끗거리는 것 같았고. 가게 안에서 볼 때도 느꼈지만 시리우스는 밖에 나와서도 남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구나, 싶었던 거. 그런 사람이랑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 피해만 주는 거 아닌가. 내가 생일 축하 한번 받지 못한 불쌍한 인생이라 선심 써주는 걸까. 그냥 친구라서? 달콤한 해방감과 즐거움에 잠깐 가려졌던 의문과 불안함이 불현듯 떠올라 리무스의 목구멍을 턱턱 막았고 결국 리무스는 스테이크를 다 먹지 못하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렸음. 시리우스가 내가 맛없다고 해서 그런가 싶어서 별로야? 하고 물었고 리무스는 다 먹은 거라고 웃으면서 대답했음.
리무스의 호기심이 터진 절정은 귀신의 집이었음. 시리우스도 진짜 이것만은 내가 안 무섭고 리무스가 무서워하겠지, 하는 마음에 표를 끊었고 대기 번호를 받고 기다렸음. 초콜릿 하나를 우물거리면서 기다리는 리무스의 시선이 어딘가로 고정됐고 잠깐 핸드폰을 확인하던 시리우스가 뭘 보나 싶어서 따라 봤음. 리무스. 응? 저거 갖고 싶어?
시리우스가 숨 새는 웃음을 흘렸고 리무스는 좀 고민하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음. 결국 시리우스는 리무스가 보고 있던 걸 사줬음. 까맣고 세모난 모양의 동물 귀가 달린 머리띠였음. 시리우스가 계산하고 리무스한테 건네줬음. 이건 무슨 동물인데? 글쎄, 개 아닐까? 개는 좀... 시리우스가 대꾸하려는데 리무스가 싹 웃더니 냉큼 시리우스의 머리에 방금 산 머리띠를 씌워줌. 시리우스가 ...? ...? 하는 사이 리무스는 잘 어울린다며 빵 터졌고 시리우스는 전혀 안 어울린다며 당황했지만 벗지는 않았음. 결국 시리우스는 놀이 공원 안에서 내내 그 머리띠를 하고 다녔고 리무스를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리무스가 뜬금없이 웃음 터트리고 나서야 자기가 아직도 그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벗었음.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요시와라 앞에 도착했음. 불이 켜진 가게를 보고 얼른 들어가서 도와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차에서 내린 시리우스가 리무스, 하고 자기를 부르자 막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시리우스를 쳐다봤음. 생일 선물. 하고 짧게 말하며 건네준 건 포장이 된 작은 선물이었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가벼운 포장이었는데 얼떨떨하게 받아드니 한손에 들어올 정도의 크긴데도 무게는 제법 묵직했음. 받고 나서 당황한 리무스가 선물은 이미 오늘 논 걸로 충분하고, 밥도 얻어먹었는데 또 받는 건 너무 과한 것 같다고 말했음. 시리우스가 과하지 않아. 하고 일축하니까 그래도... 밖에 대답할 말이 없긴 했지만. 들어가서 네 방에서 혼자 열어 봐. 이것도 가져갈래? 시리우스가 들고 있던 머리띠를 흔들자 리무스가 풋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음. 그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네가 산거라서 미안하지만... 시리우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음. 들어가서 쉬어. 괜히 일한다고 하지 말고. 이번엔 리무스가 고개를 끄덕였음. 잠깐의 침묵을 사이에 두고 시리우스가 운전석에 올라탔음. 가버리는 차를 보면서 리무스는 뒤늦게 후회했음. 덕분에 너무 잘 보냈다고. 평생 잊지 못할 생일이 될 거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고 몇 분을 멍하니 서 있다가 손바닥 안에 느껴지는 묵직함에 정신을 차렸음.
가게 안으로 들어온 리무스는 앨리스에게 다녀왔다고 하고 좀 쉬어도 괜찮겠냐고 물어봤음. 앨리스는 그러라고 해줬고 좀 미안하지만 리무스는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왔음. 침구를 깔지도 않고 바닥에 앉은 리무스는 선물을 꼼질거리다가 풀었음. 포장지 안에는 핸드폰이 있었고 리무스가 보기에도 최신형이었음. 박스를 열어서 혹시나 해서 켜봤는데 개통도 다 되어 있었고, 심지어 문자도 와있었음. 내용은 재미있었어? 발신자는 시리우스로 표시되어 있었음. 두근두근.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는 리무스는 자기 귀에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죽는게 아닐까 생각을 할 정도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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