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무] Call me maybe
시리무 현대물au
Call me maybe
Sirius Black X Remus Lupin
리무스 루핀, 25세. 독립한지 5년이 다 되가는, 떳떳한 직장도 가진 어엿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게이로 확립한지도 어언 10년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제 얼굴 어디에도 자신이 게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영국이 2005년 동성 커플의 동반자 관계 제도를 합법화한데 이어 얼마 전 2013년 7월에 동성 결혼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어쨌든 이 법안이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라 해도, 아니 이미 시행중이라 할지라도 리무스는 절대로 본인이 남자를 연애 상대로 선호한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닐 생각이 없었다. 법이 바뀔지라도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호기심 혹은 경멸에 가득 찬 시선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잘 숨기고 다녔다. 숨긴다고 연애를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확신하고 인생을 즐기고 있었건만, 세상은 일상탈출의 기회라도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저를 두 시간째 졸졸 쫓아다니는 시련을 내려주었으니, 리무스는 상상 속 도화지에 참을 인을 세 번 새기고도 남은 스스로가 폭력을 휘두르지 않은 인내심에 감사했다. 적어도 경찰서엔 끌려가지 않을 테니까. 대신 남자를 정당하게 신고할 방법을 고민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사건의 시작은 지극히 평범한 우연에서 시작했다. 리무스는 어젯밤 동거하는 친구 제임스가 냄비를 태워먹은 바람에 새로 쓸 냄비를 사러 할인 매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MP3 플레이어에 연결한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나온 김에 저녁거리로 뭘 사갈까 하는 고민에 빠져있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고, 그 바람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와 우연히 부딪혔다. 남자는 짜증스레 어깨를 털어냈고, 리무스는 이어폰을 귀에서 뺀 뒤 죄송하다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뜬금없는 부연설명이지만, 언뜻 본 남자의 얼굴은 굉장히 미남이었다. 짜증이 잔뜩 묻어있는 터라 그렇게 호감이 가는 편은 아닌 게 유감일 정도였다. 별로 다친 것 같지도 않은데. 나오려던 말을 겨우 목구멍으로 넘기고 괜찮으세요? 하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도 당장 뭐라고 할 것 같은 얼굴로 리무스를 보았는데, 실제로 쏘아붙이진 않았다. 정확히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킨 것 보였다. 보아하니 아주 쓴 말이었던 모양인지, 남자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젠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시선을 리무스가 어리둥절하게 마주 보았다. 남자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리무스가 먼저 괜찮은 것 같네요, 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워낙 인상이 강한 얼굴이라 지나가면서도 곰곰이 되짚어 본 건 사실이었다. 모델과 같은 잘 빠진 몸매에 키도 리무스보다 한 뼘은 더 커보였다. 인상적인 까만 머리카락에 눈도 자세히는 못 봤지만 검은색에 가까웠던 것 같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매도 깊고 날카로운, 어찌 보면 세상과 동떨어져 보이는 외모에, 모르는 사람과 부딪히자마자 보이는 거만한 태도까지. 여자 여럿 울려봤을 것 같은 사람.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정말 그럴 거야. 짧은 우연 사이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제 멋대로 해석한 리무스가 스스로 독심술사의 자질을 갖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자화자찬했지만, 남자가 자신을 쫓아와 어깨를 잡은 순간 독심술은 물 건너갔구나 싶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독심술이 아니었다. 처음엔 남자가 뭐라고 입을 열었는데 노랫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잠시 입모양을 읽으려고 인상을 찌푸리던 리무스가 결국 이어폰을 다시 빼고 물었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그쪽 남자한테 관심 없냐고요.”
25년 동안 남자로 살아온 리무스 루핀은 과연 자신이 여자였는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게이를 알아볼 수 있는 페로몬이 있다는 논문이라도 발표된 건지 온갖 상상을 하며 입을 딱 다물었다. 10년간 지고지순하게 한 사람만 보며 연애한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펜리 그레이백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현장에서 잡아낸 뒤 여자에게 ‘저 에이즈 환잔데 거기 있는 그 남자랑 잤거든요.’하고 웃으며 말했던 리무스 루핀이(물론 거짓말이다.), 길 가던 남자가 자신보고 게이냐고 물어봤을 때 이보다 더한 고뇌에 빠진 적이 없다는 게 우스웠다. 사실 그를 떨쳐내려고 마음먹었다면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을 굳히고 무슨 모욕적인 소리냐며 자신은 스트레이트라고 밝혔어야 했다. 인상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당황한 표정으로 멍청히 서 있으면 일단 원 아웃. 깨닫고 나서도 자신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한 데서 투 아웃. 부정은 못 할망정 그런데요? 하고 긍정한데서 쓰리아웃 공수 포지션 체인지.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처음 대처를 잘 했다고 이 남자가 떨어져나갔을 지는 모를 일이었다. 또 숨기는 거면 몰라도 거짓말은 내키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고.
아무튼 리무스가 남자도 허용 범위 안에 두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 이후로, 남자는 리무스에게 돈이라도 빌려준 것처럼 무섭게 쫓아오고 있었다. 이토록 집요하게 한 사람을 쫓아다니는 이유가 그것 말곤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돈을 꿔준 적은 없을 텐데. 그럼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이름이 뭐에요?”
“그쪽한테 이름을 알려줄 이유가 없는데요.”
“물어봤잖아요.”
“물어본다고 알려주면 통장 비밀번호도 알려줘야겠네요.”
이유가 있긴 있구나. 작업 걸 때. 말로만 들었지 당할 줄은 몰랐다. 혹시나 장난치는 걸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명으로 삼는 제임스가 친구와 짜고 몰래 카메라라도 하는 게 아닐까. 애초에 이 귀찮은 일은 제임스가 냄비를 태워서 생긴 일이잖아. 자취방에서 빈둥빈둥 굴러다니며 TV를 보고 있을 제임스에게 엉뚱하게 생각이 뻗었다. 물론 제임스에게 잘못은 없었다.
퉁명스레 대꾸해도 남자는 턱을 문지르다가 그러네, 하고 납득하더니 뭐가 좋은지 픽 웃었다. 우리는 처음 본 사이고 나는 그쪽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을 이성적인 논리로 설득하며 밖에서 씨름했지만, 날이 너무 더워 포기하고 걷느라 가까워진 매장 안으로 같이 들어오기까지 했다. 남자는 마트 안을 들어서는 순간에도 리무스의 이름을 계속 궁금해 했다. 매 초마다 물어보던 질문에 답하지 않자 남자도 일단 질문 공세를 거두고 말 수를 줄이며 따라다니는 편을 택했다. 사나웠던 정신을 추스를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리무스는 원래 마트에 온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남자를 피하려 온 게 아니라 냄비와 식료품 몇 가지를 사려고 했지.
원래 사려던 냄비를 사기 위해 주방 용품 매장을 들렀다가 찬거리를 사려고 지하의 식료품 코너를 하릴없이 도는데, 리무스는 남자가 신경 쓰여서 제대로 고르지도 못했다. 모르는 사람이 쫓아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남자는 정말 신기하단 표정으로 매장을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빈 공간을 이용해 겹겹이 쌓아올린 양배추의 탑이라든지 냉장 보관실에 얌전히 모여 있는 유제품류 따위를, 엄마 손 잡고 처음 온 아이처럼 유심히 쳐다보고 들어보고 내려놓고 하는 것이었다. 설마 마트에 와본 적이 없는 건가? 시식대에서 돈을 안낸다는 말을 듣고 놀라는 부분이 절정이었다. 리무스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도로 삼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디서 어떤 생활을 하면 가능한 이론이란 말인가. 왕실 귀족도 이렇지는 않겠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안 남자가 이쪽으로 가까이 왔다. 햄이 꽂혀있는 일회용 이쑤시개를 한 손에 든 채.
“먹어. 공짜래.”
그 준수한 얼굴에, 그 차림에 시식용 햄을 들고 내밀면서 하는 말이 공짜래, 라니. 이토록 부자연스러운 광경은 제임스가 정장을 차려 입고 30분 동안 공공장소에서 얌전히 있던 모습을 본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리무스는 햄을 받아먹는 대신 남자를 쳐다보았다.
“말은 누구 마음대로 놨어요?”
“나보다 어려 보여서.”
아, 그러세요. 순간 목구멍까지 울컥 차오르는 말을 깊은 한숨과 함께 삼켜냈다. 잘했다, 리무스 루핀. 잘 참았어. 사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도 겉으론 티내지 않는 게 리무스의 특기라면 특기였다. 제임스는 답답할 정도라고 했지만 평소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는 사람이 답답한 게 아니라 본인이 답답한 점이 제임스의 감상과 다르지만. 차라리 화를 내면 이 남자가 화들짝 놀라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도 마음처럼 험한 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뭐랄까,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여 비상식적인 남자를 앞에 두고 있으니 화를 내는 쪽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남자를 쳐다보는데 어느새 그가 내민 햄이 입술 바로 앞까지 들이밀어져 있다. 먹기 싫다고 고개를 돌리는 게 민망할 정도로 내미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잘 익어 노릇노릇한 햄을 받아먹었다. 거부했던 것치고 인정하긴 뭣하지만 맛있긴 맛있다. 약간 짭조름하지만, 어쨌든 고기류는 대지의 어머니가 키운 식량이니까. 짠 입술을 훑으며 입맛을 다신 리무스가 가만히 남자를 보았다. 남자도 리무스를 보았다. 남자의 눈은 다시 보니 까만색과는 확연히 다른 은회색을 띄고 있었다. 생각보다 은은하고 부드러웠다.
“스물다섯 살.”
“응?”
“막 반말 하지 말고 알고 나이 까고 말하자고요. 난 스물다섯 살이에요. 그쪽은?”
남자가 잘 모르겠다는 태도로 눈을 굴리다가 작게 대꾸했다. 통성명부터 했으면 좋겠는데. 흘리듯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리무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싫으면 말던가.
“나도 스물다섯. 시리우스 블랙.”
동갑이면서 저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을 운운했단 말인가. 그쪽이 노안인 거였네요, 하고 대꾸하는 대신 리무스는 그의 이름으로 추측되는 단어를 느리게 소화했다. 그의 이름은 뭔가 돌을 씹은 것처럼 입안에서 불쾌하게 덜그럭 거렸다. 시리우스,
“블랙?”
리무스는 어느새 계산대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리우스는 제 이름을 말한 뒤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리무스의 뒤에 얌전히 서있었다. 지금까지 귀찮게 행동한 것에 비하면 차분해진 덕에 리무스는 곰곰이 그의 이름과 성을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시리우스 블랙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단순히 까맣다는 뜻의 단어가 특이하게 성 씨에 자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단순한 이유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였던 것 같은데. 차례가 돌아오고 리무스는 점원의 손을 거치는 물품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컵 스프, 블랙, 인스턴트 스파게티, 블랙, 바게트 빵, 블랙, 캬라멜 쇼트케이크, 블랙, 초콜릿 바, 블랙, 비스킷, 블랙……. 마지막으로 새 냄비를 바코드로 찍은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던 리무스가 헉, 소리를 내며 제 뒤로 빠져나오는 시리우스를 돌아보았다.
“혹시 아버지가 오리온 블랙?”
시리우스의 표정이 대놓고 구겨졌다.
“일단 생물학적 아버지는 맞지.”
초록색 친환경 장바구니에 구입한 것들을 바리바리 담은 리무스가 놀라움에 찬 눈으로 툴툴거리는 시리우스를 다시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블랙 가문이라면 영국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귀족 가문이었다. ‘블랙’들은 귀족 가문이라는 이름에만 그 영향력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했다. 영국 시민으로 신문이나 뉴스를, 하다못해 인터넷으로 조금만 서핑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성이었다.
리무스는 지금까지 이름을 알려 달라며 여기까지 저를 따라온 남자와 소문으로만 듣던 고귀한 블랙 가문의 사람을 머릿속으로 연결하려 애썼다. 게다가 오리온 블랙이 아버지라면 직계 아들이다. 아들이 둘이라고 들었는데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남이어도 큰일이고 장남이면 더 사건이다. TV에서 이름이나 간간히 들을 법한 사람이 아닌가. 경악에 입을 떡 벌린 리무스가 쳐다보기만 하자 시리우스가 제 얼굴을 문질렀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지금 나랑 장난쳐요?”
이내 표정을 굳히며 어이없다는 투로 리무스가 빠르게 한마디 툭 뱉자 시리우스가 단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장난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장난, 그래 좋다. 리무스는 제임스가 어떤 장난을 쳐도 관대하게 넘어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도가 지나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블랙이 왜 나한테 이러는데요?”
솔직히 그랬다. 시리우스는 잘생겼다. 저 좋다는 여자들은 차고 넘치게 있을 인상이었다. 가문 배경도 좋고 몸을 휘감은 옷이나 시계 따위를 봐도 부유하다는 티가 났다. 딱 보기에 무식한 것도 아니다. 좀 상식 밖의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그의 행동에서는 우아함이 묻어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쏟아진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는 동작에서도 귀티가 흘렀으니 할 말 다했지. 온 몸으로 나는 귀하게 자랐으며 잘난 사람이다.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다, 하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실제로 그런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고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도 처음이라, 순간적인 위화감이 강하게 들었다.
리무스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특히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리무스가 정말 좋아서 한 연애도 있었지만 그만큼 먼저 좋다고 매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좋지 않은 끝을 본 것도 사실이었고. 그들은 리무스에게 쉽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만큼 쉽게 다른 사람을 찾아갔다. 끝낼 걸 끝내고 찾아간다면야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았으니 더 문제였지. 펜리 그레이백이 그랬다. 불쾌할 정도로 싫은 이름을 떠올리니 가시가 걸린 것처럼 목이 따끔 거리고 혀가 뿌리부터 뻑뻑해지는 기분이었다. 사람은 여러 번 만나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리무스의 철학 중 한 가지였다. 첫인상으로 속단하는 성급한 일은 하지 않았고 최대한 공정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야 가벼움으로 상처받을 일이 줄어들기 때문에.
리무스의 따가운 눈초리가 오래가니, 시리우스는 서서히 당황한 눈치였다. 초조하게 머리칼을 헤집다가 손을 내리고 다시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리곤 어디서부터 말할지 고민스러운 모양새로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리무스는 시리우스가 무슨 말을 할지 문득 궁금해져서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나는 내 가문이 아주 싫은 사람이고.”
그나마 리무스가 매몰차게 저를 버리고 떠나지 않음에 용기를 얻었는지, 어렵사리 입을 연 시리우스가 리무스의 얼굴을 꽤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리무스는 말을 애매하게 끝내고 약하게 끙, 소리를 내는 시리우스가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만만한 태도로 밀고 들어오던 그였는데, 그의 배경을 들먹이며 이유를 따지고 들었더니 대답하기는 곤란해 한다. 정말 속이거나 장난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부정할 것이 그것 밖에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누구건 간에 그냥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데.”
험상궂게 보이던 눈매가 웃느라 살짝 쳐지니 흡사 큰 강아지 같은 순한 인상으로 변한다. 평범하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짐작과는 다른 인상이라 놀란 것도 잠시, 리무스는 문득 저도 모르게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 들고 있던 장바구니가 묵직함으로 저의 존재감을 알려 황급히 그 쪽으로 시선을 떨궜다. 이상하게 초록색 장바구니에 은회색이 어른거렸다. 눈을 감았다 뜨니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장바구니가 은회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잠시간의 침묵에 시리우스가 주머니에 꽂았던 손을 빼 얼굴을 문질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스토커, 혹은 무지막지한 멍청이처럼 행동하긴 했다. 저가 그의 입장이라도 웬 미친놈이냐며 단박에 무시하고 험한 말을 했을 텐데, 다행히도 그는 시리우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시리우스는 눈앞의 왜소한 남자가 조용히 있자 어쩐지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무지막지한 힘으로 들고 있는 짐을 자신에게 휘두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장바구니 안을 뒤질 때는 장바구니가 너무 무거워서 아까 산 냄비로 때리려고 하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꺼낸 것은 냄비도, 하물며 무언가 사람을 때릴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찌른다면 모를까. 그의 손에는 까만 볼펜이 쥐어져 있었고 뒤이어 지갑에서 방금 계산하고 받은 영수증을 꺼냈다. 그들이 옆에 두고 있던 원통형 기둥에 영수증을 대고 볼펜으로 뭔가 적던 리무스가 금새 시리우스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시리우스는 인쇄된 영수증 위로 적힌 볼펜의 흔적을 읽었다.
Remus Lupin
즉석에서 적은 글씨인데도 꽤 정갈한 알파벳 밑으로 숫자 몇 개가 더 적혀있었다. 리무스 루핀, 이것이 두 시간 전부터 그에게 요구한 그의 이름임을 깨달았지만 아직 어안이 벙벙했다. 귀찮다는 태도로 일관하던 그가, 아니 리무스 루핀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시리우스 블랙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줬을까. 손바닥 크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얇은 영수증을 들여다보던 시리우스가 시선을 옮겨 리무스를 보았다. 시리우스가 미처 묻기도 전에 리무스가 먼저 말문을 텄다.
“난 첫눈에 반했다느니, 그런 건 딱 질색이야.”
바라본 리무스는 길거리에서 만난 첫인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좀 더 홀가분해 보였다. 얼핏 듣기로는 귀찮으니 당장 꺼져, 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손안에 쥔 종이쪽 하나만으로도 그저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리게 만드는 힘이 생기니 신기할 노릇이었다. 머리색보다 조금 더 짙은 밤색 눈길이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는데, 잠시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끌어당기는 따뜻한 힘이 있었다. 리무스를 처음 봤을 때 느낀 이끌림이 이 눈에서 시작됐음을, 시리우스는 뒤늦게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러니까 몇 번 더 보고 얘기해.”
리무스에게 있어선 명백한 항복의 선언이자 백기의 표시인 종이 쪼가리가 시리우스에게 있어선 금은보화나 다름없었다. 다만 어느 쪽도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은 것이 승패와는 별로 관련이 없었지만. 바닥에 내려둔 장바구니를 주섬주섬 챙기는 리무스를 물끄러미 보던 시리우스가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허리를 숙여 리무스를 도와주었다. 차 있는데 데려다 줄까? 하고 물어봤지만 리무스가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것도 나중에. 막연한 기약이었지만 시리우스는 그래도 좋다고 선선히 물러났다. 시리우스 블랙, 장장 두 시간 만의 쾌거였다.
하늘은 여전히 따사로웠다. 영국의 날씨는 흐린 날이 대부분인데 오늘만큼은 기분이 좋을 만큼 맑은 날이었다. 양손으로 장바구니를 들고 오던 리무스가 택시를 잡기 위해 길가에 섰고 시리우스는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시리우스는 리무스가 택시를 잡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가겠다고 했고, 리무스도 딱히 말리지 않았다.
“볼일 있어서 나온 거 아니었어?”
“끝내고 돌아가는 중이었지. 동생 좀 보느라.”
“동생……. 게다가 장남?!”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나고, 일방적으로 한 사람이 졸졸 따라다니던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오가는 말은 벌써 친근하게 느껴졌다. 제임스와 하는 대화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일상적인 대화. 하지만 대화 끝에 터진 리무스의 비명은 시리우스가 택시를 잡는 소리에 반쯤 나오다가 안타깝게 묻혀버렸다. 친절하게도 문까지 열어주는 블랙 가 장남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던 리무스가 택시에 올라타고 문을 닫기 전에 시리우스를 한 번 보았다. 은회색 눈이 끝까지 저를 쫓고 있음을 알고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사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성급히 말을 뱉은 건 그가 아니라 리무스 자신임을 깨닫고 더 그랬다. 블랙이 갖고 있는 선입견과 두 시간 동안 직접 느낀 시리우스 블랙. 두 개를 저울질 한 뒤에 나온 결론은,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넘겨준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해서, 어떤 철칙을 갖고 있더라도 능청스레 마음을 두드린 사람을 외면하기란 어려웠다. 게다가 이쪽에서 잘못한 것을 시리우스가 잘못한 것처럼 얘기해서 곤란하게도 했으니, 죄책감도 없잖아 작용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호감이었지만.
“전화할게.”
리무스가 짐을 밀어 넣고 택시 뒷좌석에 앉자 시리우스가 택시 문을 닫아주며 말했다. 시리우스의 머리칼을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가볍게 흔들었고 리무스의 심장도 흔들렸다. 알았어. 리무스의 조용한 대꾸를 놓치지 않은 시리우스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택시가 출발했고 뒤를 돌아본 시리우스의 큰 키는 어느새 엄지손가락만큼 작아졌다. 바로 앉아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잡은 리무스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저를 봐달라고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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