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깬 리무스가 불쾌하게 툴툴거렸지만 제임스는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소년처럼 상기된 얼굴로 저를 깨운 제임스의 표정을 본 리무스가 눈을 비볐다. 보여주고 싶은게 있어 무니! 다시 살펴 보니 이미 밖에 나갔다 온 모양인지 바깥 바람을 잔뜩 몰고 온 제임스는 얼굴만 동동 떠있었다. 잠이 덜 깨 멍하게 제임스를(정확히는 그의 떠있는 머리를) 바라보던 리무스가 도로 자리에 누웠다.
"장난이 치고 싶으면…… 패드풋을 데려가도록 해, 프롱스……."
"그게 아니야 무니! 보여주고 싶은게 있단 말이야……."
억울하다는듯 외치던 제임스가 다른 사람이 깰까 눈치를 보곤 말끝을 조용하게 흐렸다. 무니. 무니? 리무스? 리무스 루핀? 루핀 씨? 반장님? 강렬함 대신 조용하고 끈질긴 전법으로 전향한 제임스가 조용조용히 리무스를 여러가지로 부르며 어깨를 흔들었다. 좋아, 좋다고 제임스 포터. 날 깨운 이유가 합당하지 않은 거라면 네가 그렇게 부른 리무스 루핀의 이름과 멀린의 콧수염에 맹세하건데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결국 제임스의 고집에 두손두발 다 든 리무스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추운 날씨에 부르르 떨자 제임스가 리무스의 잠옷 위에 이미 들고 있던 자신의 망토를 둘러주곤 투명 망토 아래로 끌어 당겼다. 커튼이 쳐있는 옆 침대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나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제임스가 리무스의 입을 제 손으로 턱 막아버렸다. 눈을 굴려 저보다 좀 큰 제임스를 올려다보니 제임스가 쉿 하고 검지 손가락을 제 입에 가져다 되더니 윙크를 했다. 리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임스가 리무스의 얼굴에서 손을 뗐고 둘은 조용히 기숙사를 나섰다.
뚱보 여인의 초상화를 지나 계단을 내려오는 도중에도 두 사람은 특별한 대화가 없었다. 리무스가 어디로 가는지 물어봐도 보면 알 거라며 제임스는 명쾌한 대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계단을 내려왔고, 소리에 민감한 노리스 부인이 두 사람을 쫓아오는 바람에 진땀을 빼며 초상화가 잔뜩 걸린 복도를 지났고, 마법 주문 수업을 받는 호그와트에서 가장 큰 교실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똑바로 걸어갔고, 낮과는 달리 아무도 없어 고요한 대연회장도 지나쳤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아."
한참 걷던 실내에서 벗어나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야외에 맞닿아 있는 1층 복도였다. 회색 기둥 몇개와 학생들이 언제든지 넘나들 수 있는 낮은 담이 겨우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경계였다. 석조 기둥 하나를 지나 무심코 바깥을 본 리무스가 제임스에게 건네던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멈췄고, 제임스는 그런 리무스를 바라보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사온 것 마냥, 싱글싱글 웃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석조 건물과 벽돌 건물, 풀밭이었던 땅을 소리소문 없이 덮어버린 눈이 그것도 모자라다는 듯 하늘마저 메꾸고 있었다. 넋을 놓고 시린 풍경에 시선을 뺏긴 리무스는 제임스가 둘을 덮고 있던 투명망토를 벗은 것도 깨닫지 못했다. 리무스, 하며 제 손을 잡아올쯤에야 정신 차린 리무스가 제임스의 손을 꼭 마주 잡았고, 그 행동에 되려 놀란 제임스가 소리내 웃었다.
"올해 첫눈이야. 둘이서 보고 싶었어."
손을 잡은채 복도와 정원의 경계를 먼저 넘은 제임스가 리무스를 끌어당겼다. 리무스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담을 짚고 넘어가 눈을 밟았다. 발에 밟히는 감촉이 놀랄 정도로 푹신했다. 리무스가 옮긴 걸음을 따라 꼭 인위적으로 조작한 효과음 같이 꼬득거리는 소리가 쫒아왔다. 영화의 한 장면 속에 있는 것 같아 생소한 기분이 든 리무스가 제 발밑을 내려보다가 제임스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제임스의 입술이 제 입술에 와닿는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지만, 굳이 밀어내지도 않았다. 평소라면 불쑥불쑥 들이대는 입술의 버릇을 고치라며 밀어냈겠지만 이번엔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위기 탓이야. 리무스는 간단하게 결론내리고 다른 생각은 눈 위로 털어버렸다. 쪼는듯한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 눈을 뜨니 여전히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제임스의 얼굴이 보여, 리무스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정말, 못말린다니까.
이렇게 단 둘이서, 그것도 연인이 되어 첫눈을 보는 건 사실 처음이었다. 함께 있던 시간은 오래 됐지만, 조금 늦게 서로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확인하고 맞댄 탓에 앞으로는 호그와트에서 첫눈을 나란히 서서 다시 볼 기회는 고작 손가락 두 개로 꼽을 정도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제임스는 리무스를 굳이 깨워 한밤중의 산책을 감행하면서까지 이곳에 데려온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리무스가 마주 잡고 있던 제임스의 양손을 조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정말 좋다."
"응, 나도."
첫눈이 오는 곳에 두 사람이 뒤늦게 자리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눈밭 안으로 더 들어온 두 사람의 발자국은 금새 소복이 내리는 눈송이에 덮여 사라진지 오래라, 마치 두 사람을 위해 눈이 내리는 거라 생각해도 좋을 정도였다. 겨울의 추위마저 따뜻하게 만드는 포근함이 뱃속부터 우러나와 온 전신을 타고 돌았다. 그 포근함이 단순히 첫눈이 내리는 분위기 뿐만 아니라, 눈앞의 제임스 포터가 자아내는 다정함에서 또한 비롯됨을 리무스는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멈춰도 좋을텐데. 다정한 너와 그에 못이긴척 감화된 내가, 둘이서 몇번이고 첫눈을 맞이할 해가 거듭 된다면 그보다 더 한 행복은 없을것이었다.
눈이 오는 풍경에서 두사람은 몇번이고 입을 맞대고 서로를 향해 웃었다. 평생에 다시 찾을 수 없는 따뜻한 첫눈 내리는 날 밤이었다.